◆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17 주간 금요일 - 하느님까지 무기력하게 하는 작은 믿음
제가 마리아론 시험 볼 때의 일입니다. 교수님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의 의미를 지금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현대 젊은이들이라 함은 믿음이 없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는 평생 동정 교리를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은 기억 했지만 내가 수긍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기는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교수님은 수업 때 말씀하신 대로, “성경으로부터 시작 해야지. 성경 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예언도 있고, 복음에서도 처녀로 그리스도를 낳으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은 믿겠습니까?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경도 믿지 않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성경을 대고 거기에 나온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수님도 제 말에 대해 대답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느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장에 가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생각하며 그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행하고 싶으셔도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능력도 발휘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기 신부 중 하나는 첫 보좌 발령을 자신의 출신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으로 받았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고 제의를 입은 채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야~ 고추 내놓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부님이 되셨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부 할머니의 친구 분이셨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한 청년 자매가 뛰어오면서 사람 많은데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술자리를 하여도 사제로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사제가 사제가 되기 이전 모습을 더 좋아하였고 그렇게 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주임 신부님에게 꼭 붙어 있으면서 필요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과는 반대로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로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제는 그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사제가 아니고 사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사제 서품 피정 때 제 앞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일주일 동안 피정을 하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날 저녁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조그만 나무에 나뭇잎이 유일하게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연상하며 바라보면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 바로 제 앞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추고 지금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에 집중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태초부터 바로 지금 내가 지나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두신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렇게 나뭇잎 하나로 주님의 섭리하심이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기에 내가 사제가 되기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까지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성소를 확신하며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게 뭔 대수라고...”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수녀님은 “저는 신부님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믿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는 더 이상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는 그 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억을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무의미하겠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느끼는 것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더 이상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마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고 싶지만 우리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그 분의 활동은 내 안에서 제한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권능도 보이실 수 없으셨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에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사십니다.
좁쌀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그 분의 권능을 드러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나를 버리고 믿음을 증가시켜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더 사시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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