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요한의 목을 다시 주십시오 [사랑의 신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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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09-08-01 | 조회수40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신앙 = 믿음
" 믿음은 생각이나, 의견이나, 이데아가 아닙니다.
이 믿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의 친교이기 때문에 생명이며
그분을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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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에게 그리스도는 사건과 사물들을 평가하는 잣대였으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친 모든 노력의 목적이고, 세상을 향한 길을 걸어가는 그의 걸음을 지탱해준 위대한 열정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 (갈라 2,20)라고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분, 내 말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해하고, 역사 속에서 길을 찾는 진정한 원칙입니다. ...
사도에게 부활은 죽음과 동떨어진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분은 언제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입니다. 부활하셨지만 상처를 지니고 계셨으며, 수난이 그분 안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그분은 부활하셨지만 우리와 함께, 또 우리를 위해 사시므로, 세상 끝나는 그 날까지 고통을 당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라는 부활하신 분의 정체성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의 만남에서 깨닫습니다. 그분께서 바오로에게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9,4)라고 말씀하신 그 순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분이며,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바오로는 교회 안의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십자가가 “하느님의 저주이지만” (신명 21,23) 우리를 구속하는 희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지혜가 영원부터 이미 존재했음을 말하는 지혜서의 같은 텍스트들은, 이 지혜의 강생 곧,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마련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미 우리는 주님의 몸을 가리키는 장막에 대해 말하는 요한복음의 단어들에 갈채를 보내고 싶어집니다. 구약에서 하나의 장막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건 ‘토라’에 따른 성전과 예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훨씬 더 참되고 의미가 있는 장막, 곧 그리스도의 몸인 장막의 예표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벌써 지혜가 자신을 낮추어 육신으로 내려오실 때 거절당할 가능성 또한 지니고 오셨음을 보게 됩니다.
성 바오로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해 가면서, 이 지혜서의 전망에 집중하며, 예수님 안에서 처음부터 영원히 존재하신 지혜, 세상에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마련하신 지혜를 알아보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로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다.”(1고린 1,24.30) 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는 지혜와 같으신 그리스도가 특히 이 세상의 통치자들로부터 배척당하실 수 있음을 (참조 1고린 2,6-9) 천명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의 모순적인 상황인 십자가가 마련되었고, 그것이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길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전 존재는“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6절)라는 구절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심은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7절) 라는 다음 절로 이어져,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8절) ... 참으로 와 닿는 부분은 극단적인 낮춤과 이어지는 하느님 영광 속에서 드높여짐 입니다. 분명히 이 둘째 단락은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아담의 거만함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스스로 하늘에 이르는 다리를 건설하여 자신들을 신격화하고 싶었던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의 몸짓과도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교만한 시도들은 자기파멸로 끝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늘로, 참된 행복에로, 하느님께로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했던 몸짓은 꼭 그 반대입니다. 교만이 아닌 겸손, 곧 사랑의 실현이며, 사랑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극단적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신 그 시도로 사람의 교만을 반대하셨으며, 그것이 참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하느님이 우리들을 끌어 당기시는 하늘로 드높여지신 것입니다. ...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머리이시며, 모든 사람을 받아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그분의 겸손에, 이웃을 향한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시어 우리도 내려감과 올라감의 움직임 안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아들 안에서 우리도 함께 자녀가 되는,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일반 알현 - 강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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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 서간은 우리에게 율법을 기초로 하여 법이 정하는 행위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의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얻어지는 의로 바오로가 어떻게 건너가게 되는지, 손에 잡힐 듯한 증거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순간까지 이익처럼 보였던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실제로 손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께 걸기로 결심하게 됩니다.(참조 필리 3,7) ...
우리는 우리가 풀려난 이 "율법"이 무엇인지, 또 사람을 의화시키지 못하는 "율법에 따른 행위"는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코린토 공동체 안에서 이미 이런 의견이 존재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체계적으로 바로잡아 졌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도덕법을 다루는 것을 제한해야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윤리로부터의 해방으로 이루어지는 듯 설명하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코린토에서는 "모든 것이 내게 합당하다."라는 말이 성행했습니다. 이런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며, 성 바오로가 말하는 해방은 선을 행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이런 모든 규칙 준수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헬레니즘 문화 시대에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당시 보편적인 문화를 이루었던 이 문화는 외형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다신론적 문화였고, 관용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문화적 획일성을 강요하는 압력을 행사했고, 그렇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위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헬레니즘 문화의 공동적인 정체성으로 들어가도록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즉 선조들의 신앙,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의 약속이라는 귀한 유산을 잃어버릴 처지가 되었습니다. ...
그가 부활하신 분과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로 상황 전체가 극단적으로 바뀌었음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하느님,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은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 되셨던 것이지요. 에페소 서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 이스라엘과 이민족을 갈라놓던 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신론과 그로 인한 모든 타락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보증해 주십니다. 벽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우리들의 진정한 정체성은 곧 그리스도이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의롭다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규정 준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표현은 믿음이 애덕에, 사랑에 반대되지 않을 때 참된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며, 그리스도께 바짝 붙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태와 생명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닮아서 그분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 바오로는 의화에 관한 자신의 교리를 특별히 전개한 갈라티아 서간에서, 애덕을 통해 활동하는 믿음에 관해 말합니다.(참조 갈라 5,14) ... 바오로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두 겹의 사랑 속에 율법 전체가 담겨 있고 이루어짐을 압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사랑을 만드는 믿음 안에서, 율법 전체가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의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마지막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뿐이며, 오직 애덕뿐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과 성 바오로 사이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애덕을 만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같은 시각이니까요. 애덕은 그리스도와의 친교 속에서 실현됩니다. 이처럼 그 어떤 다른 방법도 아닌,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만 우리는 의로워집니다. 결국, 주님께 기도하는 일만 남습니다. 믿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믿도록, 믿음으로써 생명이 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되며, 우리 삶의 변모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그분의 사랑으로 변모되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되어,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일반 알현 - 강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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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의 순환이라는 측면에서 - 현재를 조명한다면 *
본문에서 율법 => 이념이라는 '율법의 상황'으로 대비시켜 견주어 보시길 바랍니다. ( 이념 = 율법이 되다 )
십자가 => 세상의 통치자로부터의 배척 당함을, 세상의 이념주의자들로 부터의 배척 당함으로 견주어 보시길 바랍니다.
"선을 행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 악함도 선함으로 변질되는 '이념적 인식'의 체계화. ( '절대선' 없다는 상대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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