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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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먹이셨던 곳에도 계시지 않자, 그들은 그분을 찾아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갑니다
(24절).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내고는 어떻게 그곳에 가셨는지 당황하며 묻습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전에 있던 곳에는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제자들이 그 배를 타고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22절).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왜 그토록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잠시 이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개의 이적 설화 가운데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유일한 설화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6, 1‐15)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어 그들이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놀라운 일을 보고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종말의 예언자 또는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면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하자, 그분은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지요(15절). 그 뒤 카파르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갔던 사람들은 바로 그분을 정치적 메시아로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인 듯합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냐는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 상태를 지적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들이 배부르게 된 ‘이적’, 곧 ‘놀라운 일’과 예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표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현상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이적’과 ‘표징’은 예수님의 활동과 제자들의 사명에서 곧잘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예 : 사도 2, 22. 43; 6, 8). 보통 일상생활에서 볼 수 없는 ‘이적’에는 그것을 지시하는 ‘표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바람과 달리 빵과 물고기로 배불렀던 이적 사건에만 마음이 가 있고, 그 속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 13‐14)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있는 물질로서의 물 그 이상을 알지 못하였듯이, 지금의 군중도 먹어서 배부른 물질로서의 빵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절) 다른 어느 누구한테서가 아니라 예수님한테서 그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께 파견받은 분으로 그분께서 행하시는 표징들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일에 정통성과 권위를 보장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 35)
이에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본디 그리스어에서 ‘하느님의 일들’입니다. 곧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지요.
그들의 이런 모습과는 상반되는 명쾌하고 단호한 대답이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29절)이라고요. 여러 가지 일들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이루는 데 필요한 ‘하느님의 일’은 오직 한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일에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대화의 상대방인 예수님 쪽으로 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며,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만나를 먹었던 일을 들추어냅니다.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보고(6, 14 참조), 모세가 행한 것과 같은 기적을 예수님께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몰이해와 아집의 두꺼운 벽이 예수님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구약성경을 들고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고 하느님이셨다.’라고 설명해 주시고, 지금 ‘그들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당신 아버지이며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4, 15) 했던 것처럼 사람들도 말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그러나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우물로 물을 길러 오는 수고를 덜겠다는 생각에서 물을 구한 것처럼,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청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깨닫지 못함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양식이신 당신을….
“나에게 오너라, 나를 원하는 이들아.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집회 24, 19)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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