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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과 거룩함/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03 조회수552 추천수2 반대(0) 신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신비롭고 거룩한 그분의 뜻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가?
내 희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의지가 빚어 내는 허상일 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관적인 느낌이나 짧은 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는

거짓되고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방법을 고안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죄로 물든 나의 의지는 당연히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 상황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나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반대되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항상 악에 더 이끌리게 되어 있어,

자연적인 욕구는 무엇이나 다 죄스러운 것이라는
이런 추론은 일종의 마니교도적인 가정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
즐거움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욕구가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원죄의 교리는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였고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항상 죄로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악마도 그렇다고 해서 천사도 아니다.
사람은 순수한 존재는 못 되지만 육과 영을 모두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실수와 악의에 찬 감정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확실히 죄인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사랑과 은총에 반응한다.
또한 선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도 응답할 줄 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리스도교적 방식은

추상적인 논리의 추론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몸의 일원이고,

 그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는 정도는
그가 같은 몸을 구성하는 다른 일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위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살아 계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도 서로를 통해 신비롭게 전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한다.

하느님의 뜻은 이러한 상호 의존성에서 찾을 수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아 둗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1코린 12,12-21)

그리스도교적 '방법'이란 전례의 준수,

고행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과

그의 형제간의 객관적인 관계가 요구하는

자발적인 사랑이라는 가치의 문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또 가시적(可視的)으로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 몸의 일원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의해 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계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명시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는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수덕(修德)'방법'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의 벗이 되어 줌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원수마저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진정한 벗이 된다.

(마태 5,43-48 참조)


불의와 폭력 앞에서도 희생과 인내와

온유함의 정신으로 처신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좀더 관대하고 친절해야 하며,

서로를 향해 모욕하거나
악의 섞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마태 5,21-26 참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방법'은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뜻을
그리스도 신비체의 실질적인 구성원과 잠재적인

구성원들 간의 상호 관계 안에서 찾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 협력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구원의 도구가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성령 또한 우리가 준 사람에게서 받고,

받은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삶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초자연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된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일치의 끈'이신 사랑의 성령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살아 있으며 유기적이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외적인 일체감을

부여하는 조직 이상의 것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각자의 존재 깊숙이 살아 활동하는 생명에 의해

구성원들을 일치시킨다.


이 생명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신비체의 구성원들 안에서

끝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각자가 능력에 따라

자신의 역할과 신분에 맞게 자신의 모든 형제들,
특히 사랑의 질서상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과 봉사에 투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녀, 친척과 친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뻗어 가야 한다.

이제 우리의 희생을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는 규범이 되는 것은

사랑의 질서라는 분명한 가치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보다

 보편적인 상위의 선을 위해 우리가 개인적인 이익을
포기한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이 다른 이들의 행복과 교회의 선(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희생의 가치는 우리가 감당한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분열의 벽을 깨는 힘,

 상처를 치유하는 정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질서와

일치를 복원하는 힘으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넓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옹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가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12-21)

"그러므로 너희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들과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3-26)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이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3-18)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그들을 섬겨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자각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이 기본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명백해 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구성원이자

우리와 동일한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중대한 의무가 있고,

 또한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삶과 거룩함」에서
Thomas Merton 지음 / 남재희 신부 옮김 / 생활성서 펴냄

 

 


Thomas M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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