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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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8-05 | 조회수55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 18주간 수요일]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시사하는 것은 이방 여인마저도 예수님에게 자신의 딸을 치유해 달라며 애걸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잘못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고향에서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내용과도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우를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의 명산 중에 명산은 도봉산과 북한산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병풍을 펼쳐놓은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많은 분들은 금강산과 설악산에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산으로 칭송하였지만 막상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진가를 알지 못하고 경시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주위에서 무수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원했던 노벨 평화상을 우리 전직 대통령이 수상하였으나 우리 국민은 오히려 로비운운하며 헐뜯는 경우가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서울 사람보다 외지인이 도봉산과 북한산의 아름다움에 더 감탄하듯이, 우리보다는 외국인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우리 전직 대통령을 더 높이 평가하듯이 이스라엘 민족보다는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신 말씀은 사랑과 자비의 화신인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믿기지 않는 말씀이고 이는 이스라엘 민족들은 예수님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방 여인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고 하신 말씀은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고 있었다면 예수님께 어떤 수모를 당하여도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를 시험하시느라 그 여인의 딸을 강아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이 말씀만을 생각하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하신 말씀을 상기시켜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방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을 복음서 기자는 전자의 입장에서 기록하였을 것이지만 요즘 우리 일부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면 후자의 의미로 묵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릇되게 알려주는 일부 짝퉁 그리스도교를 경계하라는 말씀으로, 불의한 자들은 거룩한 가르침도 곡학아세하여 민중들을 현혹시켜 민중들을 지배한다는 그런 의미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는 이방 여인의 답변에 감탄과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한마디에 예수님은 더 이상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그대로 인용하여 성체를 모실 때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다.'를 매번 반복하고 있지만 거의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으므로 성변화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셨으므로 예수님이 내 소원을 들어 주실 것으로 믿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세상을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의 이치만 통달하면 나머지 세상사는 그 원리가 동일하므로 자연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이치인 하느님의 뜻을 부스러기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빵이 아니더라도 빵 부스러기만 있으면 그 빵의 성분을 모두 다 알 수 있으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빵 부스라기만 있으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범죄현장에 버려진 담배꽁초만 있어도 DNA를 축출하여 범인을 알 수 있으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빵 부스러기는 빵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장 배가 고프므로 빵을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할 빵을 일시는 공급받을 수 있으나 영원히 공급받을 수는 없으므로 빵의 성분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우리 스스로 빵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말씀의 부스러기를 가지고도 우리의 우매함을 깨우쳐야 하지만 매일 빵을 먹으면서도 오직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급급하여 빵의 성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배워서 많이 알고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말씀의 부스러기를 귀동냥으로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깨우쳐서 이를 실천하면 우리의 불치병은 모두 치유될 수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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