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15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06 조회수391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 세분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도 산을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높은 산에서 우리가 사는 삶터를 바라보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주 평화스럽게만 느껴지고, 온 자연이 다 내 것인데 한 뼘밖에 안 되는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옹다옹하며 사는 모습이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저 많은 집들 중에서 내 집하나 없다면 서럽기도 할 것이고, 내 살 집하나 장만하려고 바동거리며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있지만 초기 공동체에서는 지금과 같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없었으므로 오늘 복음은 초기 공동체의 관점에서 묵상하지 않으면 오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사후에 제자들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하여 민중들에게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교리 형성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은 예수님께 신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 논쟁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피로 얼룩진 논쟁이었으므로 초기 공동체에서는 신성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지위를 민족들이 가장 존경했던 사람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민족들이 가장 존경했던 지도자는 모세이고 가장 존경했던 예언자는 엘리야이므로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이며 엘리야처럼 위대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모습을 오늘 복음으로 기록한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는 표현은 예수님의 몸에서 광채가 발산하였다는 뜻이므로 이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몸에 베여있다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사람의 얼굴 모습만 보고도 그 사람의 인격을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얼굴을 얼골이라 하였습니다. 얼골은 우리 내면의 모습인 얼이 모인 골이라는 뜻으로 마음이 온화한 사람은 얼굴도 온화하게 보이듯이 얼굴은 우리 마음의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 복음서에서는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오늘 복음에서는 얼굴 모습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성화와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광배는 오늘 복음 등을 형상화한 것으로 머리 뒤 부분의 둥근 광배는 원광이라하고 온몸의 배후에 그려진 타원형의 광배는 擧身光이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된 권위로 우리 모습이 빛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인격을 수양하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고 온갖 치장으로 외모만 화려하게 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하고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권위를 내 세우기 좋아하는 직분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표시를 하고 다닙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금배지를 달고 다닌 사람들이고 우리 신부님들과 스님들도 외모로 신분을 알아 볼 수 있지만 이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므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단논쟁에 휘말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들이고 예수님만이 하느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이와 달리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만약 제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면 저는 전자의 해석을 따랐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분들과 동등한 반열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였다면 이분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예수님도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므로 같은 반열이므로 꼭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아들은 아닌 듯하고, 주님의 기도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 이 말씀에서 어느 부분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모습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를 중시하면 기복 신앙으로 흐를 수 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중시하면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으로 발전할 것이고, 이 말씀의 방점은 어디에 있는지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으므로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인격을 수양하여 온갖 탐욕에 찌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가 되도록 매일매일 변모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참된 권위를 지니셨습니다.
저희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인격을 수양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여주시고
온갖 허세로 자신을 포장하여 권위를 인정받으려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모습을
깨뜨려 주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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