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삶과 거룩함/구성원을 성화시키는 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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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09-08-06 | 조회수41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완전함이란 주님과 일치하는 데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완전함은 성령의 은총으로 완성되는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함으로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가르침 아래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Spirit Christ)의 인도를 받고 법, 가르침, 성사와 전례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기관이나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가르침과 통치와 예배 방식 안에서 이러한 외적인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 교회의 영혼은 인간적일 뿐 아니라 신적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그분의 거룩함으로 정화된다. 전능하신 구세주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며, 그러므로 교회의 참다운 본질은 하나의 몸 안에서 서로에 대해 거룩한 섭리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인들의 통공에 전적으로 그들의 기쁨은 생명의 강이라는 순수한 흐름을 맛보는 것으로 기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함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과의 교류를 심화시킴으로써 얼마나 능동적으로 깊이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들과 살아 있고 성장하고 있는 신비체라는 영적인 조직 안에서 그렇다고 영적인 완전함이 '사회적 순응'의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라는 효율적인 기계 안에서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된다고 해도 예를 들어, 교도권에 의해 축복받은 전통적인 규범의 규제를 확실히 가장 값진 성화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수도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그 규범들은 목적을 갖고 있고 목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건물을 짓느라고 설치한 임시 장치를 실제 건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실질적인 건물이라고 하면 사랑과 희생, 이 건물의 건실함은 성령이 우리 각자의 체계에 의해 정돈되고 규제되는 외적인 사회적인 삶은 필수적으로 특정 질서를 요구하고,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질서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영적인 삶을 진지하게 새각하는 사람들 중 임시 장치를 영구적으로 더욱 단단하고 안전하게 세우는 데에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고독하고 내면적일 수밖에 없는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어느 누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 내면적인 영역에서 진보나 완전함을 증명할 만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반면 외적인 영역에서의 발전은 쉽게 측정될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보여져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 이 작업은 명백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대한 그분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전적으로 그것은 내적이고 고통스러우며 우리가 전례 때마다 교회와 함께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온전히 내놓았을 경우에 한해서만 진실하고 타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내적으로는 은총이 주는 영감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투항하는 것이고 「삶과 거룩함」에서 Thomas Merton 지음 / 남재희 신부 옮김 / 생활성서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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