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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원형인 ‘청원기도’
교회는 기도하는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오심을 기도하며 기다렸다(사도1,14).
예루살렘의 초대 공동체는 기도하는 공동체였으며(사도 2,42;12,5),
이 공동체는 유대인들의 기도 관습을 따라 살았다(사도 3,1).
그러나 곧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근본 바탕을 버리지 않고
고유한 기도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래서「구약성서」는 교회의 훌륭한 기도학교로 남아 있다.
구약의 모든 기도형태는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롭게 조명되었으며
성령의 활동 안에서 계속 발전되었다.
그 첫 번째 자리에 청원기도가 있다.
청원기도는「구약성서」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인간 기도의 원형이다.
예수께서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청한 제자들에게 직접
주님의 기도의 일곱 가지 청원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하느님께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다는 것의 표현이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며,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사도 17,28).
청원기도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다.
하느님께 청할 때,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때문에
청원기도 안에는 찬미의 요소가 들어 있다.
때때로 청원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스스로 무기력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율적인 인간은 청원하기를 원치 않는데,
그 이유는 청원을 무능력한 청원자들 대열에
자신을 넣어버리는 굴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인간적인 부족함에 대한 오해이다.
즉 인간으로서 우리가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청하고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에 대한 오해이다.
둘째,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오해이다.
즉 하느님께서 위대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인간의 의존성을 아주 고통스럽게 느끼도록 하셨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청원기도에서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아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성부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르쳐 주셨다.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뢰 안에서 모든 것을 청하기 위해서
청원기도는 필요하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한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부여해 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귀찮게 구는 친구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라고 가르치셨다(루가 11,5-13).
따라서 청원기도는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서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고통 역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망각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사용하였고,
너무 경솔하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이러한 고통 안에서 새롭게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용서와 도움을
청하며 하느님께 돌아간다면 무자비한 심판관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루가 15,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