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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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8-07 | 조회수42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하시며 크게 혼을 내시고 난 다음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가 왜 꾸중을 들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드로 사도가 왜 이처럼 모진 꾸중을 들어야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1-22)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시며 베드로 사도를 엄히 꾸짖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 사도는 참으로 황당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사즉생, 생즉사로 이해하면 예수님께 또 꾸지람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요한 6,63)고 하셨습니다. 불의에 맞서 목숨을 버릴 줄 알아야 영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음에도 베드로 사도가 이를 방해하므로 이토록 심한 꾸지람을 주신 것입니다. 병법에서 인용한 사즉생, 생즉사는 육의 관점에서 설명한 말이므로 오늘 복음의 참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육신)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영혼)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육신)을 잃는 사람은 목숨(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신 짧은 말씀 속에는 목숨이 네 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언급되는 목숨은 육을 말씀하시고 계시며, 두 번째와 네 번째 언급하신 목숨은 영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편의상 목숨을 괄호로 묶어 봤습니다. 우리 신앙은 육신과 영혼의 영육이원론의 관점이지만 저는 이보다는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몸나와 얼나가 제 정서와는 더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성현들의 고귀한 얼은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지만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다석선생님은‘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는 아주 간결한 말씀으로 풀이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도‘죽음’이 네 번 언급되고 있으며, 몸나가 죽기 전에 얼나로 태어나면 몸나가 죽을 때에 얼나는 죽지 않는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나 때문에' 하신 이 말씀에서 '나'를 '진리나 정의'로 대체하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보면 불의에 맞서 정의를 부르짖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그 얼은 영원할 것이지만 불의와 타협한 자는 그 목숨도, 얼도 한순간의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재해석을 해 봤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의 의미는 우리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하며 이 말씀에서 하느님의 뜻은 '진리와 정의'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므로 너희들도 내 제자가 되려면 이런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 말씀의 의미는 정의가 불의를 물리치고, 진리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그날이 오면 재평가 작업이 이뤄진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신 말씀은 불의와 맞서 싸운 사람들은 대부분 사후에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지만 살아생전에도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신 분들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로 기억나는 분들은 도마 안중근 의사와 백범 김구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아직 사흩날이 되지 않아서 완벽하게 부활하지 못한 그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묵살할 때마다 자주 느낀 점이지만 예수님은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못하셨으며,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그 고귀한 가르침은 아직도 무덤 속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만은 바르게 전달되기를 기도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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