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19 주일 - 성체, 하늘에서 내려온 율법서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이 봉성체를 나갔는데 치매 할머니였습니다. 집에 들어갔더니 그 할머니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밥 줘, 밥 줘!”만을 연신 외치고 계셨습니다. 가족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꿈쩍도 안 하시던 할머니께서 신부님의, “성체 모시셔야죠!”하니까, 손도 씻고 얼굴도 씻고 앉으셔서 성체를 정성스럽게 영하시고 그 날은 멀쩡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봉성체를 매일 오셨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육신의 밥을 달라고 할 때는 정신이 없다가도 영적인 밥을 먹을 때는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영성체는 육신의 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으로 돌아가고 흙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영혼은 하늘에서 왔고 하늘로 돌아가며 그래서 하늘에서 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깨닫게 하신 가장 큰 것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열매를 먹는 것이지만, 영원히 살게 하는 나무는 그 ‘나무’ 자체를 먹는 다는 것에 과연 생명나무가 무엇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 묵시록에까지 나옵니다. 즉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상 예루살렘 안에 심겨져서 그 곳에 사는 이들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는 나무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나라에 있는 양식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무’라고 하면 사람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땅에서 시작하여 하늘로 오르려는 모습이 사람과 흡사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벳사이다의 소경이 영적인 눈을 뜬 다음 사람을 보면서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나무’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로 성자께서 육체를 취하셔서 태어나신 날, 나무를 잘라 장식하는 전통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탄트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트집을 잡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예수님의 몸이 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썩어버릴 인간의 보통 육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천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도 하늘에 사시고 그 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도 하늘에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육체가 성자의 신성과 결합되면서 그 육체 또한 영원한 신성을 지니게 된 것처럼, 그 분의 몸을 먹고 그 몸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도 그 분의 영원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면서도 당신은 “살아있는 빵.”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다 죽은 것들이 우리 속으로 들어갑니다. 산 것이 들어가도 몸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지만 그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들은 죽은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님을 먹는 것이고 예수님을 빨아먹든, 녹여먹든, 씹어 먹든 그 형체는 사라지지만 그 양식인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사시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내 안에서 사시게 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은 내 안의 작은 우상인 자기 자신의 자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분의 몸을 영하는 이들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지 않으면 인간은 텅 빈 성전, 즉 생명이 빠져나간 죽은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다 떠나갔어도 다른 설명을 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신교가 말하는 것처럼 그분의 살은 그분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들을 잡고 그렇게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은 영적인 보이지 않는 무엇이 아니라, 보이는 육체와 영혼에 생명을 주는 양식, 즉 당신의 ‘몸과 피’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되셨을까요? 몸과 피는 바로 그 분의 생명, 즉 자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고 모든 것을 주는 것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사랑이고 생명인지도 동시에 가르쳐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체는 사랑의 덩어리입니다. 세상에 성체보다 작은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큰 사랑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작아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무한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유한 속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만약 백 평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세 평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 왔다고 합시다. 정말 답답해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한하시던 분이 유한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 답답함을 무한대로 극대화시키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작아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중에서 큰 인간이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가장 가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차가운 나무 위에 놓이셨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머리 누일 자리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으며 결국 마지막으로 머리를 누인 곳이 바로 십자가 나무였습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작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어도 그런 하느님께서 그렇게까지 작아지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손 위에 올라올 수 있을 만큼 작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양식이 되기 위해서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손바닥 위에 올라오실 만큼 작아지셨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렇게까지 작아지지는 못합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먹히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것은 바로 이 작아짐을 모시는 것이고 이 작아짐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은 커지려고 할 때 이 작아짐의 힘은 사라지게 되고 그 영혼은 결국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빵의 정신을 잃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잃은 죽은 영혼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영하며 그 정신과 일치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 빵은 더 이상 생명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그 성체를 영하는 사람에게 그 성체의 정신을 심어주고 살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성체와 한 몸이 되지 않으면 그 성체 안에 있는 영적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체는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하셨듯이, 우리에게 사람이 되시고 그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그래서 당신과 한 몸이 되라고 우리를 매일매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는 우리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율법서이고 십계명 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작아지고 져주고 밥이 되어주는 삶이 성체와 하나 되는 삶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