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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0 조회수416 추천수4 반대(0) 신고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 12,24-26)

     -유광수 신부-

 

제가 이 복음 묵상을 쓰고 있는 곳은 여주군 강촌면 도전리라는 깊은 산골 마을이다. 밭에 심어 놓은 고추, 콩 등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고 논에 심어놓은 벼들도 원기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올해는 대풍년이 될 것 같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자연만큼 하느님의 섭리에 잘 순응하는 것도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따가운 햇빛이 내려 쬐면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춤을 추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을 흘려가며 받아들이고, 추우면 추운 대로 옴추르며 그대로 견뎌낸다. 한번도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나간다.

 

봄에 푸른 옷을 입히면 푸른 옷을 입고, 가을에 단풍 옷을 입히면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에 옷을 벗기면 앙상한 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항상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모든 자연은 이토록 하느님께 순응하건만 유독 인간만이 하느님의 섭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기를 든다. 추우면 춥다고 불평하고 더우면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하느님의 섭리에 반항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병들고 나약해지고 추하게 변해간다. 인간이 하느님께 순응하면서 나이를 먹는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 즉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해 갈 텐데....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모른다. 자연이 아는 진리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자연은 진리대로 살고 인간은 그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 자연과 인간과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인간들이 알아듣고 진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아는 자연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봄에 뿌린 벼 씨가 땅에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벼가 나서 무럭 무럭 자라고 있듯이 인간도 자라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은만큼 자라야 한다. 인간이 자란다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 죽어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불평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연이 하느님께 절대적인 순명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에 순순히 순응하는 모습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죽지 않기 때문에 툭하면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악을 쓰고 대들고 이를 갈며 투덜대는 것이다. 벼들이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인간도 나이를 먹으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지 말고 다소곤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며 나이 먹음의 무게이다.

 

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겸손을 라틴어로 "humilta"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가장 낮은 곳이며 누구나 밟고 다닌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어린이 어른, 미운 사람 고운 사람, 서양사람 동양 사람 흑인, 죄인이거나 의인이거나, 살인자이거나 강도이거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밟고 다녀도 불평이나 거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비를 받아들이고 햇빛을 받아들인다. 쓰레기를 받아들이고 침을 뱉으면 침을 받아들인다. 추위를 받아들이고 더위를 받아들인다. 대소변을 받아들인다. 땅은 거부하는 법이 없다. 불평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어준다. 그것이 땅의 겸손함이다. 그것이 땅의 봉사요 섬김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요 섬김, 자연에 대한 봉사와 섬김,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이다. 그래서 땅이라는 humilta라는 단어는 겸손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하며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섬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인 땅에 떨어져 고개를 떨구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이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있는 곳에 우리도 함께 있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를 거부하고 겸손의 미덕을 멀리하고 있는가? 하나도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팔팔하고 뻣뻣하다. 모두 다 자기가 잘났고 왕이기 때문에 하느님도 이웃도 모두 다 떠받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 분수(꼬라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내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의 결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참으로 명언임을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유태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감옥의 간수장이가 랍비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당신은 성서 말씀이 영원하며, 모든 세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믿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간수장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시대마다 각 사람을 부르십니다. '너는 네 세상에서 어디쯤 도달했느냐? 너에게 주어진 햇수와 날수가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의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하느님은 '너는 마흔여섯 해 동안 살아왔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거지요." 자기 나이를 언급하자 간수장은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랍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그렇지만 속 마음은 떨렸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그 삶의 방식에 대하여 책임지게 하신다. 부버에 따르면 이 결정적인 마음 살핌은 인간에게 있어 영적인 길의 시작이다. 그 작고 조용한 목소리,'너 어디 있느냐?'고 하는 목소리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은 채 헤메이게 될 것이다.

 

아담은 그 목소리에 직면했고, 자기의 곤경으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발견하였다.

'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우리 삶의 지도에서 '현 위치'와 같다. 지하철 역 안내판의 '현 위치'에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지점을 확인하고 나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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