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의견을 존중하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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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09-08-11 | 조회수59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마다 자기 성읍으로 돌아가시오.” 하고 일렀다.(1사무엘 8:19-22)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을 때,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처럼 왕이 있어야 하니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한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자신과 자기가 세운 두 아들을 배척한다고 생각하여 언짢기는 했지만 야훼께 기도 드렸더니 야훼께서는 “저들이 너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나를 배척하고,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원하는 대로 왕을 세워주라.”고 대답하시며, “그러나 일단 왕을 세우면 그 왕이 백성을 얼마나 괴롭힐 것인지에 대하여 일러주라.”고 하셨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왕이 어떻게 백성을 수탈하여 못살게 굴 것인지를 자세하게 일러준다. 그래도 그들은 고집을 부렸고, 결국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첫 왕으로 삼았다.
야훼께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익히 알고 계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집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깨닫지는 못하고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련을 떨어 당하게 내버려두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성인이었던 잘랄루딘 루미(1207-1273)가 이런 인간의 망상인 “착각”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실은 암묵적으로 ‘내 눈은 밝다.’는 것을 말하며 결국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내 눈이 충혈되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며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미는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는 인간을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라>라는 시(詩)에서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참이냐?”고 꼬집었다.
그대 진정 사람이라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라.
아니거든 이 무리를 떠나거라.
반쪽 마음을 갖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느님을 찾겠다고 나선 몸이
언제까지 지저분한 주막에 머물러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참인가?
『논어』<자한편(子罕篇)>에 “의필고아(意必固我)”라는 말이 나온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이를 잘 풀이하고 있다.
“意는 사의(私意), 必은 기필(期必), 固는 집체(執滯), 我는 사기(私己)를 말한다. 곧 意는 주관적으로 억측(臆測)하는 일, 必은 반드시 관철하겠다고 무리하게 구는 일, 固는 완고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굳은 태도, 我는 자기 것만 생각하는 아집(我執)을 말한다.
意, 必, 固, 我는 각각 하나의 병통(病痛)이지만 그것들은 서로 순환한다. 혹자는 의(意)와 필(必)과 고(固)가 모두 아(我)로부터 나오므로 아(我)만 없으면 나머지 병통이 사라질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배우는 자가 갑자기 아(我)를 없애려 한다면 道에 위배되고 만다. 최한기는 무아(毋我)를 최종 덕목으로 보되, 기(己)란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없으므로 극기(克己)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약용은 무아(毋我)를 舍己從人(사기종인)에서 찾았다. 사실, 나의 부족한 것을 버리고 남의 좋은 점을 따르는 일이야말로 나를 성숙시키는 근본 태도가 아니겠는가!” “에고를 떠나는 길은 자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한 것을 버리고 남의 좋은 점을 따르는 것이다.” 정약용은 “사랑은 남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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