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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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9-08-13 | 조회수1,735 | 추천수22 | 반대(0) 신고 |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 마태오 18,21―19,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 안에 미소 짓고 계신 하느님>
용서(容恕)란 단어처럼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인간’,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 ‘짐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인간’으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 ‘인간’이 내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원활하게 가동될 리 없습니다. 즉시 이런저런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절실한 하느님 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에 집중하려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작업입니다. 용서(容恕)란 단어의 용(容)자는 ‘받아들임’을 나타냅니다. 서(恕)자는 상대방을 뜻하는 如(여)자와 심(心)자로 이루어져있으니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용서란 말은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나름대로의 고충을 참작해주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다시 그를 받아들여주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그와의 관계형성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실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용서의 과정이 우리 내면 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네 삶을 즉시 휘청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영혼에 퇴적되는 갖은 독소들-적개심, 증오심, 복수심, 미움, 폭력성, 분노...-은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편해집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 찾을 필요도 있습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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