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22 | |||
---|---|---|---|---|
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8-14 | 조회수410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 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미사와 [성모 승천 대축일 전야]미사로 두 대의 미사가 있습니다. 오늘 묵상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미사의 복음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고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으므로 각 고을에서 선포하신 복음은 거의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기자는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거의 대부분의 말씀을 처음 복음을 선포하신 산상설교에 기록하였으며 나머지 말씀들은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하나하나 설명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 산상설교에서 하신 여섯 가지 반제의 하나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마태 5, 31-32)하신 말씀을 다시 설명하신 말씀이며 어제 복음인 죄의 용서에 관한 말씀은 '화해하여라.' (마태 5, 21-26)를 설명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성사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므로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복음입니다. 얼마 전에 원장 신부님께서 혼인미사를 주례하신다 하여 주례하실 성당을 여쭤봤더니 제 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이고 제 동네에 오셨으므로 신부님께서 주례하신 혼인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당시 혼인미사에 참석하신 분들은 생전 처음 보는 혼인미사의 모습에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며 이어서 너무 감격하여 모두가 숙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혼인미사를 주례하시며 신랑, 신부 양가 부모님에게 바닥에 업드려 큰 절을 올리셨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랑, 신부를 이처럼 훌륭하게 우리 사회의 일꾼으로 성장시켜 주신 노고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에게도 모범된 결혼생활을 간곡히 부탁하시며 같은 모습으로 큰 절을 올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인 결혼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신부님께서 큰 절까지 올리시며 간곡히 부탁하신 모습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저는 장차 제 아들의 주례를 신부님께 부탁하려고 하였으나 감히 신부님께 큰 절을 받을 수 없어서 포기할 생각입니다. 그 전에 제게 들려주신 신부님 말씀은 부부생활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시켜서 결혼시키는 이 땅의 부모님들의 노고에 대하여 당신이라도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는 마음이 우러나서 얼마 전에 주례를 하시며 큰 절을 올렸다고 하였습니다. 결혼생활도 해보지 못한 신부님께서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계신 것은 아마 고해성사를 통해서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묵상하고자 하는 말씀은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특히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완고하다는 것은 변화를 싫어하는 모습이므로 오직 전통과 관습 그리고 격식과 형식을 중시하여 본질을 놓치는 경우로 이런 사람들 일수록 경전의 문자에 얽매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페단 때문에 禪에서는 불립문자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문자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道와 法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경의 첫 말씀은 '道를 道로 이름 지으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 하였으며 부처님은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느 상에 사로 잡혀있으면 그 본질을 보지 못하므로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완고한 모습을 我相이라 하며 설사 진리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갇히면 그것을 法相이라 합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은 我相은 물론 法相에서도 벗어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상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으며 이런 자들이 바로 法相에 억매인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에 교리를 진리처럼 절대화하는 敎相이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불완전한 남녀 두 사람이 결합하여 한몸으로 완전한 모습이 되어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을 깨뜨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번 주간 수요일 복음인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신 말씀을 실천하면 결혼생활의 행복은 보장될 것입니다. 당시 사회 풍습을 잘 알지는 모르지만 추측하기에는 아내는 지금처럼 남편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남편은 맘에 들지 않으면 아내를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므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면 아내는 일정한 재산을 위자료로 받을 수 있으므로 오히려 여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은 이런 방편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본질을 빨리 깨우쳐라 는 뜻에서 '아내를 버리지 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말한 방편을 아직도 진리로 알고 있으나 내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러나 아직도 모세의 방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방편에서 벗어난 사람만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방편에 대하여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봅니다. 전라도에 사는 사람이 예수님께 서울을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북쪽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다음은 함경도 사람이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쪽으로 가라 하였습니다. 인천 사람이 묻자 동쪽으로 가라 하였으며, 춘천 사람이 묻자 서쪽으로 가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의 방향은 동, 서, 남, 북 어느 쪽이 맞습니까? 서로가 예수님이 알려주신 방향이 옳다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 내 생각과 다르다고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를 깨우쳐 주는 것이 바로 모든 가르침의 으뜸인 宗敎이며 창의적인 사유를 속박하는 정형화된 도그마를 믿는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예를 들면 도스에서 윈도우로, 윈도우도 그 버전이 수없이 업그레이드되어 지금 저는 윈도우 xp를 쓰고 있지만 그 이후 버전으로 윈도우 비스타와 윈도우 세븐까지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까지 도스 운영체제에서 머물어야 하고, 언제까지 예수님의 여러 방편 설교를, 성경의 여러 방편적인 내용을 사실로 믿고 따라야 합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이를 믿나이다! 하며 신앙 고백을 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또 들어야 합니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 말씀은, 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되어 오늘 묵상에서는 유달리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공관 복음서에서 공히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 9)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고 계시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어쩜 우리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들려으므로 우리 교회부터 말씀을 실천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