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삶과 거룩함/자선의 사회적 관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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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09-08-19 | 조회수44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그리스도교적 자선(charity) 은 자주 피상적으로 이해되곤 한다. 마치 부드러움, 상냥함, 자비는 당연히 이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자선을 그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우리와 같은 혜택과 위안을 받는 사람만을 이 개념은 우리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 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이들이 정의가 없는 자선은 있을 수 없다. 그 실천 여부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내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 자선은 미성숙한 것이다. 진정한 자선은 사랑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의 법에 의해,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곤궁과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계층과 국가와 인종들 간의 관계에서 사랑의 부족으로 인해 가장 불행한 일은 이런 사랑의 결핍 현상이 너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불의와 증오를 정당화하도록 복음서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베풀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 목마른 이들의 목을 적셔 주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과 사도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교적 자선은 구체적이고 외적인 사랑의 자신의 소유물과 시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희생은 실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오만하게 온정을 베푸는 척 하며, 자신의 자아를 부풀리는 거만한 태도는 자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화를 나눌 때에는 마음도 함께 나누어 공동의 불행과 가난 그렇게 해야만 불행하고 혜택받지 못하는 어떤 경우에는 다수의 불행한 이들과 나누기 위해 더 나아가 자선에 대한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자선을 형식적으로만 하게 만들어 선의를 표시하기 위한 이런 자선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 그것은 다만 사회적 불의를 눈감아 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유지시킬 뿐이다. 가난한 이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데 협조한다는 뜻이다. 현대에 와서 가난과 고통은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심지어 부유한 나라에도 이 불행은 만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이 불명예가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이 낳은 무능력과 불의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는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 세상의 문제를 한 사람이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과 가난을 줄이는 데 자신이 자신이 고통과 가난을 지속화하고 부채질 하는 데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적 자선은 수백만 명이나 되는 그리스도인의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가난과 고통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러나 아프리카, 남미와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까지 사회적 혜택이 미처 돌아가지 않은 우리는 그것에 대해 과연 무엇을 하고있는가? 호주머니에서 몇 푼 꺼내 건네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자선에 내포된 이 깊은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적 완전함의 사도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고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같은 편지에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이들의 돈을 착취하여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야고 5.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대하듯 이웃을 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 소망은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구체적인 행동이 없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강론에서 자주 소개되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입은 사람을 도랑에 버려 두고 간 사람은 성직자와 레위들이었다. 그를 도운 사람은 겸손한 이방인이었다. 우리는 어느쪽인가? 성직자인가, 레위인인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인가? 「삶과 거룩함」에서 Thomas Merton 지음 / 남재희 신부 옮김 / 생활성서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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