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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해설+묵상>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23 조회수444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신명 4,1-2.6-8)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시편(14)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나이까


 제2독서(야고 1.17-18.21ㄴ-22.27)

 들은 말씀을 실행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복음(마르 7,1-8ㄱ.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연중 제22주일

 독서 및 복음 해설


 제1독서(신명 4,1-2.6-8) 해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관하여 반성한다


 신명 4,1-40은 모세가 한 이야기처럼 제시되고, 그 내용이나 문체로 보아서 분명히 시기적으로 전대(前代) 문헌들을 참고하여 쓰인 것 같으며(신명 5-11), 오히려 그 문헌들에 대한 해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과거에 겪었던 엄청난 체험을 반성하고, 동시에 거기에서 미래를 위한 가르침을 길어내고 있었다.

 1-4절은 모세가 백성에게 가르쳐 준 ‘규정과 법규’를 지키라고 초대하는 머리말로서의 성격의 가지고 있다. 2절에서는 모세가 지키라고 명한 ‘계명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계명들을 준수해야 하는 동기는 ‘생명’과 결부되어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4절). 규정과 법규와 계명이 적힌 본문에는 아무것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 이 말은 인간이 임의대로 그 계명들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모세가 제시한 법률은 가나안 땅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5절). 그 실천은 선택된 백성이 결정적으로 성립된다는 분명한 증표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귀양살이하는 공동체 안에서 논쟁거리였던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백성들에 비하여 우수하단 말인가? 다른 문화들이 지닌 지혜와 견줄 때 그러한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다른 민족들의 종교들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6-8절에서는 오직 솔로몬 시대에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라였다고 말한다.

 이제 저자는 자기 견해를 밝힌다. 이스라엘은 비록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그 시대의 성전을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항상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야 하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참된 지혜는 오직 하느님만 주실 수 있으며, 순수하게 하느님께로 가까워져야만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편(14) 해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나이까


 이 시편은 주님의 참된 종이 지키는 윤리 법전이다.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참된 종교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은 전례 규정들을 세밀히 엄수하는 일이 결코 아니고, 정의(正義)를 실천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2-5절; 참조. 이사 33,15; 미가 6,6-8).

“이를 실행하는 이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5절)


 제2독서(야고 1,17-18.21ㄴ-22.27) 해설

 말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라


 하느님 홀로 인간들에게 유익하고 좋고 완전한 선물과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흔히 사람들은 남에게 무엇인가를 베풀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은밀한 의도를 품고 있기 십상이다.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란 고작 일시적일 뿐이고 변덕스러울 뿐이다. 참된 선물과 은총은 높은 데서 오고 빛의 아버지(시편 136,7)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하느님은 인간을 깊고도 오래 가는 사랑으로 기르시므로 그분의 은총은 변함이 없다. 그 위대한 사랑이 드러나는 증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소 ‘새로운 생명’이 되어 주신 하느님 자신이시다. 신약성경에서 ‘새로운 생명’이란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온갖 은총과 선물, 곧 ‘하느님의 나라’(루카 12,32), ‘성령’, ‘구원’(에페2,8), ‘영원한 생명’(로마 6,23)을 모조리 합쳐놓은 총합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란 하느님 사랑으로 태어난 자녀들이다(18절). 하느님은 당신 어지신 뜻에 따라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고, 진리의(진실한)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살도록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셨다.

 인간들은 복음의 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받아 태어난다(1베드 1,23; 티토 3,5). 새로운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피조물들 위에 높이 들려지고,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물로 자기 자신을 바치고, ‘첫 열매, 맏물, 맏이’로서 주님께 봉헌되는 제물이 된다(신명 26,1-11). 예수와 예수처럼 사는 사람들과 예수와 더불어 수난과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은 만물과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된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심어진 말씀과 옛 사람이 지닌 습성을 계속 대조한다(참조. 에페 4,22; 콜로 3,8). 이는 분명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내포된 가르침을 되울리고 있다(참조. 마태 13,3-9; 18-23과 병행구절). 실상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말씀은 그냥 듣고 지나치는 목소리로 그쳐서는 안 되고, 윤리 생활을 지도하는 살아 있는 신앙의 진정한 표현이 되어야 마땅하다.

 27절에서도 가식적인 신앙생활과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흠 없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분명하게 대립시킨다.

 인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법률과 제도와 구조의 테두리 안에 안주해 있으면서 오히려 불의(不義)의 혜택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짓눌리고 빼앗기고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는 형제자매들에게 ‘나눔의 정의’를 실천하여 함께 어우러져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대립해야 한다.


 복음(마르 7,1-8ㄱ.14-15.21-23) 해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마르 7,1-23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13절)은 유다인들의 정결 예절에 대하여 말하고, 둘째 부분(14-23절)에서는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 사이의 구분을 제시한다.

 첫째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단식 전통에 관하여 말씀을 계속하신다. 전통적인 단식 규정들은 ‘신랑’이 이미 와 있기 때문에 폐기되어 마땅하다(마르 2,18). 이 같은 맥락에서 몸과 손을 씻는 옛 전통 규정들도 더 이상 가치가 없어졌으므로 폐기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옛 전통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대든다.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전통이란 것이 단지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 낸 규정일 따름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걸림돌이 되는 전통이라면 마땅히 걷어치워야 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그런 걸림돌을 치워내야 한다고 답변하신다.

 인간들이 멋대로 만들어 낸 전통 규정들은 진정으로 인간들을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고, 하느님의 말씀이 다스리고 능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질서’만이 인간들을 속속들이 깨끗하게 하고 구해 낼 수 있다고 답변하신다.

 둘째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깨끗한 음식과 불결한 음식을 구별하는 미세한 규정들을 전면 부정하시면서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그런 규정들은 그 규정들을 착실히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줄 수 없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갈 자격으로도 되지 못한다(히브 9,9). 메시아 시대에 효력이 있는 것은 단 하나, 마음의 변형이고 용서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이 다른 사람을 더럽히고 때리고 빼앗고 죽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생애로 들려주고 보여 주신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에 순응하고 실천하는 길만이 모든 사람을 감동시켜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인류가정공동체’를 이루게 할 수 있다.


 묵상


 우리의 생활과 하느님의 말씀


 오늘 읽은 복음은 사뭇 혁명적인 말씀이다. 당시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던 윤리적 또는 종교적 개념들에 도전하여 뒤집어엎는 말씀이고, 모든 시대에 걸쳐 속물근성을 가진 인간들의 정신에 도전하여 뒤집어엎는 말씀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도 그 말씀은 혁명적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우리 사고방식과 마음을 완전히 바꾸도록 채찍질하고 있다.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규범․법률․제도․구조․체제를 절대화하고 모든 사람이 그 틀과 범주 안에서 안주하거나 굴종하고 있는 한가운데서 그 말씀은 혁명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로지 하느님의 계명, 즉 사랑하라는 명령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그 명령에 철저히 따르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하고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 아직까지도 종교가 흔히 사회생활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거나, 체면이나 신분을 지키는 데 필요한 위장물이거나, 자기를 지켜 줄 수 있는 피난처 또는 보호막이거나, 사사로운 심리적 보상이나 위안을 받기 위한 대상이거나, 자기 나름대로 설정한 자기 완성을 위한 보조 수단이거나, 가상적으로 설정한 완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단순히 종교적 규율과 규범에 따라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은 자칫 잘못 하다가는 보호 울타리 속에 스스로 가두는 꼴이 되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역사 현실과 사건에 등돌리는 가식적 인간으로 굳어지는 수가 있다. 그런 인간은 자기 존재 깊은 데서부터 말씀이 지닌 영원한 창조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노라면

 늘 새로운 사건이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혁명성’의 뿌리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굳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사랑을 받아들이며, 하느님과 그리고 모든 사람과 생생한 창조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믿는 인간이 지닌 가장 깊은 문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깨닫고 그대로 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말을 참으로 알아듣고 호응한다는 것은 인격 대 인격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뜻하고, 단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흥미와 관심을 느꼈다는 정도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로 생생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 몸소 현존하여 계심을 느끼고 있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바라고 계심을 느끼는가? 우리의 주된 관심은 주일미사에 나가고 주기적으로 고백성사를 하고 금령들을 절대 범하지 않으려 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지 않는가?

 그럴 때 신앙과 종교는 윤리주의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신앙이란 신학적 덕행이며, 우리 정신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행위이다. 신앙인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다. 이런 관점으로, 야고보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행동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만남은 인간관계와 인류 사회에 구체적인 결실을 남기고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내는 식으로 들어서는 안 되고, 주의 깊게 들어서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다음 그 만남을 생활 실천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신명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복된 땅으로 들여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 와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인간이 따르고 순종할 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이시지 인간이 아니며, 우리가 따르고 순종할 법률은 하느님의 법률이지 인간의 법률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인간의 명령이나 법률은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거절하는 것이 참된 인간가족을 이루는 인류의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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