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백성사로써 단점을 제거하고 내적 생활을 정리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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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09-08-28 | 조회수51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고백성사로써 단점을 제거하고 내적 생활을 정리함
우리가 자신을 고발하고 사제가 판결을 내려 죄를 사하고 보속을 정해주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형식은 필요하고 없어서도 안 될 외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고백성사의 심오한 신비와 거룩한 작용입니다.
앞서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세례성사는 재생 혹은 부활이며 고백성사는 병의 치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치료라고 하면 우리는 몸에 이상이 생기어 몹시 불편하거나 상처로 고통이 심하면 의사에게 찾아가 진찰을 받고 치료하듯이 영혼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거나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 고통이 없는 동안에는 자기 영혼의 병, 또는 상처를 모르기 때문에 별로 손을 써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자기의 잘못이 뚜렷하고 심적 충격이 클 때에는 걱정이 생기고 양심의 가책과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몹시 고민하게 되는데 이때 고백성사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단에서 넘어져 몹시 아플지라도 참아 견디어 병원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비록 일시적인 양심의 가책이나 불안을 느끼다가도 얼마가 지난 뒤에는 잊어버리고 다시 잡다한 일생 생활에 얽매 반성 없는 나날을 보내는 것을 우리 자신 스스로가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것을 제대로 알기위해 고명하기 전의 성찰은 진지하고 철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찰할 때에 심각한 죄의식이 없다면 통회와 정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식이 깊고 강해야만 참된 통회를 할수 있고 또한 굳은 정개로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릴 것을 스스로 다짐함으로써 완덕을 위한 정화의 길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고백할 때에만 성찰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의 하루 생활을 돌이켜 반성함으로써 성찰하는 습성을 키워 갈 때, 영적이익이 클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통회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된 통회는 마음 속의 영적 밭을 깊이 파 헤쳐야 됩니다. 이것을 상등통회라고 하는데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으나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으로 통회를 일으킬 은혜를 베푸시어 진지한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기도 합니다.
탕자의 비유(루가 15장)에서 처럼 하느님은 항상 죄인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고, 또 깊이 뉘우쳐 당신께 오는 죄인은 뜨거운 사랑으로 맞아 주신다.
진정한 통회는 항상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다시 불붙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등통회로써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영혼은 항상 성녀 막달레나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으로 가서 십자가를 붙들고 우리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피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죄를 기워갚는 보속으로 십자가를 질 때 그 대죄 자체는 매우 추악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 하느님은 바로 사랑 자체이시라는 진리가 최상의 신비적인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다시 짖지 않고 또한 죄 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결심하는 정개와 성찰한 죄를 사제 앞에 겸손되이 명백하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고백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고 보속이 고백성사의 목적을 달성하고 신비적인 효력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고백후에 사제가 준 보속만으로 보속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요리문답에서는 "사제의 보속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니, 스스로 다른 보속을 하거나 대사를 얻음으로 그 보속을 채워야 한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선의 뜻이 없고 보속의 수고를 아끼며 싫어하는 죄인에게는 공의하시고 무한히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리 쉽사리 죄사함의 은총을 내려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막달레나나 성 아오스딩 같은 분들은 회개하기 전에는 대죄인이었으나 일단 모든 것을 뉘우쳐 회개한 후에는 영웅적인 보속을 함으로써 성인 대열에 올랐던 분들로서 우리는 그분들을 통해 회개와 보속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때마다 ㅅ제가 정해준 보속외에 어떤 선행이나 기도 등을 함으로써 완전한 보속을 할 것인지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한 죄의 성질에 따라 그 행동의 보속 또한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고집이 세고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애정이 없는 사람이므로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잘 줍니다.
이런 사람은 굳은 정개로써 자기가 여태껏 미워한 사람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드리고 어디에서든 그를 만날때마다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다음 고백성사를 볼 때에 똑 같은 죄를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개라는 것이 이분을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또 게으른 탓으로 자기 본분을 등한히 하거나 직무를 소흘히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자기 태만의 죄를 보속할 결심을 굳게 먹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 일과를 마음에 새기고 정각에 어김없이 자기가 할 일이나 또는 맡은 바 직무에 착수하는 습성을 기르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재차 게을러져서 태만죄를 짖게 되는 경우에는 단식이나 기타 자기만의 고행을 곁들인 보속을 통해 극기와 인내심을 키워 자기의 태만을 바로 잡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기의 게으름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신 수양에 힘써 결점을 고치고 악습을 고치며 완전한 인격을 도야(陶冶)함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정화의 길로 나아가려는 그리스도 신자는 언제나 자기의 정신수련이나 인격완성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동기에 기반을 둔 신앙적 행위로 발전 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보속 과업을 수행함으로 우리자신의 단점을 고치고 허물을 없애며 완덕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완성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신앙인들은 정화적인 상태로 나아가려면 진지하게 고백성사를 받고 열과 성의를 다해 보속과 희생적 봉사와 기도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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