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제민 신부님의 '인생피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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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화 | 작성일2009-09-11 | 조회수2,19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제가 견진교리를 받을 때 과제로 주어진 책이었습니다.
2개월에 걸친 준비기간 동안 묵상나눔을 했던 것과 과제를 마치려고 책을 읽으면서 요약을 해 두었던 것을
오늘 컴에서 자료정리를 하다가 발견했습니다.
나름 열심이었던 모습이 이제와 낯설게만 느껴지고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내가 미처 오르지 못할 만큼 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기도생활과 신실한 신자로 거듭나시려는 형제 자매님들께 권해 드리고 싶은 책이기에
제가 메모해 두었던 것 올려드립니다.
한 해의 결실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은 풍요로운 은총을 직접 맛볼 수 있는 사랑과 은총의 계절일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1. 인생은 피정이다
... 인생은 피정이다
이 글은 책머리에서부터 ‘“현대인은 바쁘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살다 보면 내 몫의 일거리가 없어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바쁜 무리들 속에 섞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이렇게 바쁘고 때로는 힘겨운 현대인의 일상을 이 글은 피정를 통해 창조의 기쁨이 있는 세상으로 초대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인생은 피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피정(exercise)은 인생이 연습이고 과정임을 알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다. “인생 자체가 과정이고 시행 착오를 계속하는 연습생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피정은 세상을 떠나 고요에 잠기는 시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위로, 무서움과 아늑함,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체험하고, 이 만남을 통해 인생에 주어진 창조의 첫 순간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시간이다.”
“예수님의 쉼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창조의 순간이 있는 곳 광야” 나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이 글의 10%밖에 읽지 못하였지만 내가 왜 이 글을 읽어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광야란 고난의 마지막 시험의 의미만 있었을 뿐 그 안에서 아늑함이나 편안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현대을 살아가면서 온갖 문명의 利器들에 의해 시달림을 받고 끝도 없는 사치스런 생활로 피폐해져 가면서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바라본 광야는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고 평화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그곳이 피정을 통하여 쉼터가 되고 창조의 기쁨을 주는 곳이 된다.
피정, 나에게 있어서 피정은 애써 유혹을 물리치거나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나에게 주어진 일에 혼신을 다하면서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최고였지만 좀더 성숙한 나를 발견하고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광야에서의 쉼을 통해 성령에 의지하고 자신의 삶을 재창조해 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광야,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가진 곳. 광야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메마른 내 가슴일 수도 있고 무관심하게 버려진 내 형제일 수도 있고 언제나 벗어나고 싶어했던 과거의 시간들일 수도 있고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과 일들 일 수도 있다. 나는 이 광야에서 나의 문명 생활을 돕기 위한 재물을 버리고 내 영혼을 찾고 하느님을 찾아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 어린이가 되는 연습
이 글에서 “어린이는 아직 자기의 일을 자기의 주관이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는 하나, 그만큼 자기 생명의 원천에 가깝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정을 통하여 어린이가 되는 연습은 하느님과 인간이 처음 만나는 순간, 원초적인 모습으로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물과 영으로 다시 나야한다.” 는 말씀으로부터 어린이로 다시 난 어른이란 영적인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삶은 부활의 삶이기도 하다.
피정을 통하여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죽음 후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reductio in mysterium)이다.
피정이란 “다시 신비로, 다시 어린이로 태어나는 삶을 터득”하는 연습이다.
나에게 있어서 법은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법은 나를 구속하고 불편하게 하고 그늘을 드리우는 울타리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법으로 인해 자유를 얻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과 관련된 예언을 이루시는 일도 하느님으로 인간이 되신 일도 법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그 법으로부터 자유로우셨다.
... 인생과 쉼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쉼이란 세상의 온갖 소란스러운 것들을 잠시 떠날 수 있는 여유였다. 그것은 때때로 풍요로움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하고 현대인이라면 레저를 통한 넘치는 에너지의 발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쉼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쉼 자체, 즉 안식이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쉼이고 어떻게 안식에 이를 수 있는가?
이 글에서는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다 휴식시키고 쉼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서도 안식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안식일의 쉼으로 인해 피조물은 이제 스스로 실존할 수 있고, 살 수 있으며, 또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이 쉴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창조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피조물과 사귀기 위해 안식을 필요로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쉼이란 허약한 몸에 깃든 백신같은 작은 병마와 싸우기 위해 잠시 앓아 누워있을 때였던 것같다. 나의 생활에서 조그만 여유가 있었다면 더 크고 더 화려한 곳으로 나아가서 나의 맵시를 뽐내고 싶어했을 테니,,, 돌아보면 이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었다는 생각이다. 그 어떤 병도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었으니,,, 그리고 내 육신이 아픈 동안 내 영혼은 쉴 수 있었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쉼은 여유와 나눔을 베푼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예수의 모델과 한참 후에 찾은 유다의 모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진실된 얼굴, 평화스러운 얼굴, 그런 얼굴은 자기의 일과 인격이 하나가 될 때 나타난다. 그 얼굴을 우리는 ‘깨달은 얼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쉼’을 발견한 얼굴이다.”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께서 환자를 치유하거나 사람을 만나기 전에 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며 쉬시는 장면을 대한다. 그 쉬심에서 대한 얼굴, 그것이 우리의 얼굴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피정을 통하여 “일을 쉼과 같이 쉼을 일과 같이” 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 깃든 여유가 날 평안케 하고 안식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 믿음과 들음
“피정은 신앙의 인간이 되기 위한 연습이다. 잘 쉬기 위하여 내맡기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 내맡기기 위하여 신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게쎄마니에서 예수께서 ‘아버지, ...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내맡김과 쉼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내맡기고 쉬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자세이다. ”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믿음과 신뢰의 상태는 모태에 있는 아기이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음, 원초적인 음, 하느님의 음성이 있다. 다행히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 소리를 듣는 존재이다. 들려오는 소리를 향하여 원천적으로 열려있는 존재이다. 신학자들은 이를 두고 인간은 ‘초월적 존재’, ‘말씀의 청자’(칼 라너)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음의 노래란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되는 것, 새 소리와 트는 새싹으로 시작되는 것, 그것이 차츰 커지고 깊어져 마침내는 우리 안에서 이름할 수 없는 분의 목소리로 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으름의 찬양/러끌레르끄)”
“피정은 듣는 연습이다. 그리스도인은 듣는 존재이다. 쉼은 들음에서 가능하고 들음은 쉼에서 가능하다.”
들음은 내맡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우리의 사제들...
욥은 성서속의 인물 중에서 예수와 가장 닮은 삶을 산 인물이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들과 비유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권한을 물려받았으면서도 그 상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에 고난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의 사제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그 사도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우리 신자들은 믿고 따른다.
거짓 예언자는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사람들이다. 거짓 예언자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내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거짓 예언자를 분별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도들의 삶을 통해서 분별해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피정을 통하여 얻은 영성은 그런 분별을 가능하게 한다. 그 영성을 얻기까지 우리는 기다림(판단하지 않고, 잘 듣고, 내맡기고, 잘 쉼)의 시간들을 보내야 한다.
하느님의 안식일은 기다림의 날이기도 하다.
... 기다림
“믿음과 들음은 기다림을 요구한다. 내가 얼마나 잘 쉬는 존재인가는 나의 기다림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쉴 줄 아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며 가장 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가장 잘 쉴 줄 안다.”
“그리스도 자신은 삶안에서 십자가를 기다리시고 부활을 기다리셨다. ‘기다리는 존재’이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
“모세(출애 24,12-18)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위해 이렛날까지 기다려야 했고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의 회개를 커다란 인내와 사랑으로, 침묵으로 기다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기다림은 한국인의 기본 정서임을 믿는다. 우리의 이 기다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을 잃으면 홍익인간의 이념도 미래도 모두 잃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결코 기다릴 줄 모르는 졸부들의 세상이 될 수는 없다.” “기다리는 인간은 자기를 기다려주는 하느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존재에게도 순명과 겸손의 덕으로 대하며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다. 그러기에 그는 항상 여유를 보이는 희망의 인간이다. 나는 지금 이 사회, 이 민족이 겉으로는 각박하고 성급해 보일지언정 그 깊은 마음에는 확실히 이런 기다림, 신뢰, 겸손, 희망, 사랑, 용서가 간직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의 저자는 인간의 깊은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여 활짝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임을 알 수 있다.
2. 쉼과 창조
... 시간의 거룩함
“그에게 있어 시간은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었고, 부활의 시간이었다. 인생이 하나의 시간임을, 그리고 그 시간이 영원과의 만남임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첫날 창조하신 시간은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피조물이 처음 만나는 시간이며,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거룩한 시간이다. 첫 인류는 이 사건을 기념하며 모든 시간에서 이 거룩함을 체험하고자 한다. ........ 거룩한 시간은 “원초적인 신화의 시간이 나타난 것이다. 모든 종교적 축제, 모든 예배의 시간은 신화적인 과거에, ‘태초’에 일어난 거룩한 사건의 재현을 나타낸다. 축제에 종교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벗어나서 축제 그 자체에 의해 재연된 신화적 시간에로 복귀하는 것을 포함한다.”
“기도는 우리를 태초의 시간, 하느님과의 첫 만남이 있었던 그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태초의 시간에 우리를 잠기게 한다.”
피정은 우리를 태초의 시간으로 이끌어 가는 연습이다. 피정은 우리의 성숙함을 드러내기 위한 기도이다.
작고 어린 잎이 바람에 쓰러지고 발자국에 밟혀서 꺾이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물리적인 힘이다. 피정은 이런 물리적인 힘을 넘어서는 연습이다.
... 공간의 거룩함
“모든 공간이 하느님의 창조와 쉼의 공간임을 보아야 한다. 모든 짐승들, 모든 식물들, 모든 생명체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과 그들과의 만남, 하느님과 생명들의 만남을 보아야 한다.”
“모든 공간이 하느님의 공간, 거룩한 공간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공간 안에서 생명의 거룩함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공간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거룩한 공간임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쉼에로 몰입해야 한다. 공간을 공간이게, 창조의 공간, 생명의 공간이게 놔두어야 한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다스려야 한다. 창조의 순간처럼 생명이 숨쉬는 공간이게 해야 한다. 나 자신도 그 창조된 세계의 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피정은 공간안에서 피조물이 되어가는 연습이다. 피정은 공간안에서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어가는 연습이다.
... 종교적 인간
“종교인이란 일상의 삶에서 성속의 일치를 이룬 사람, 자기가 처해 있는 시공에서 천지 창조의 순간과 그 공간을 건드린 사람이다. 그러기에 종굦적 인간은 세상에서 거룩한 것의 수많은 양상들을 발견한다. 세상은 단순히 속(俗)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계시되는 속이다(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종교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은 언제나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시간을 시간이게 놔두며, 공간을 공간이게 놔둔다. 사물을 창조의 사물이게, 일을 하느님의 일이게 놔둔다.”
종교적인 인간은 흘러가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일이 되도록 놔두고, 예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일이 되도록 행동한다.
피정은 종교적인 인간이게 하는 연습이다. 피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는 연습이다.
3. 예수와 그리스도인
... 예수의 ‘나’, 우리 모두의 ‘나’를 찾은 존재
“그는 시공에 제한된 자기의 ‘나’를 태초의 시공 안에서, 영원한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였으니, 처음부터 하느님 곁에 있는 영원한 존재였다. 그는 태어나기 이전의 영원의 시간, 태초의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점에서 사신 존재였다.(요한8;48-59)”
“예수께서는 자기의 시간적 생명을 죽음 후 영원으로까지 연장시켰으니 그것이 부활의 삶이다. 부활은 육체적 생명이 죽기 이전의 생명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영원으로까지 확장시킨 삶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부활로 자기의 삶을 창조의 순간과 일치하는 종말의 순간에로, 그 영원 안에로 확장시켜 사신 것이다. 시간에 제한된 듯한 그의 삶은 선재와 부활의 삶이다. 선재와 부활을 모르는 삶은 허무하다. 우리는 예수처럼 영원에서부터 시작하여(선재) 영원으로 돌아갈(부활) 몸이다.”
“몸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몸은 내어주는 것, 내어놓는 것이다. 몸은 공동체의 장소이며, 만남을 향한 개방의 장소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자기를 버림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하느님에게까지 확장시킨 장소이다. 그는 자기의 몸으로 이 ‘나’를 찾은 첫 번째 존재였고, 이로써 우리의 ‘나’를 찾게 해준 존재이다. 예수의 ‘나’를 통해서 우리 자시의 ‘나’, 자연의 ‘나’, 우주의 ‘나’, 사회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알기 위하여 나를 부정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모순적이지만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것이었고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살아오면서도 육신의 부활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思考의 한계일 수 밖에 없다.
피정은 인간이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을 발견하고 ‘나’를 발견하는 연습이다. 피정은 침묵으로 세상에 말을 건네는 연습이다.
... 예수의 ‘나’에 나타난 복음
“그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 도래했다고 선포하시면서 이 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야 한다고, 지금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이다.”
“회개란 이 십자가의 길로 방향을 잡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을 지상으로부터 꺼내어 저 위의 천국으로 안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들이 사는 땅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어디에서 우리는 예수의 ‘나’를 찾는가? 천국이 있는 곳, 곧 십자가와 가난한 이들이 그 장소(산상 설교, 마태 25장)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와 가난과 죽음은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이 아니며, 가난한 이는 우리가 그저 적선을 베푸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난이 있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것같은 인생이 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호사가들이 있고 그 중에서 동정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동정심의 대상은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진리나 진실에 합당하고 일치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육적인 만족감을 넘어선 그들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이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십자가와 가난에로 마음을 향하는 것이다.”
“회개는 이 현실을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이다. 회개(metanoia)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린다는 뜻인데, 이는 곧 ‘하느님의 방향’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데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로, 인간의 현실로 들어오셨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의 회개는 인간과 그 현실, 나아가 자연과 우주로 마음을 움직여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돌아섬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운데 인류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일이 실행됨을 의미한다.”
“천국과 지옥, 이웃과 원수, 성과 속 등 이원화된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돌아서서 시공 안에서, 원수에게서, 속에서, 심지어는 지옥에서도 하느님을 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젤로틴(로마와 유다, 황제와 하느님 권력의 이원), 바리사이(너와 나, 네 편과 내 편의 분리), 엣세네(빛과 어둠, 성과 속의 이원)에게 회개를 요구하신 것도 그들이 근본적으로 이런 이원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회개는 변화다. 우리는 이 변화를 위해 하느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그 말씀을 완성하셨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억지스러운 일들이 전부였다.
하느님께로 향해 있지 않았고 도마 위에 놓인 생선처럼 언제 잡혀 먹힐지 모르는 가난하고 미약한 존재, 그런 존재는 언제나 숨죽이고 살아야 함을 가끔씩 잊어버리고 나는 내 목소리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어설픈 양심은 나를 막지는 못하였지만 나는 하느님께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 부패하고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품안으로 불러들이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인간으로서, 여자로서의 삶을 수없이 되돌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해질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것들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죽음까지도 날 막을 수 없을 때까지 더 밝게 빛날 수 있을 때까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기를 원한다.
... 자유인 예수
“그분은 자유인이었다. 진실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율법을 옳게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로 어디에 도달할 수 있는가’ 묻기보다 ‘어디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하고 물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무욕, 무심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경국의 미인을 대하고 나서야 음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밤에도 불 같은 욕정을 금하지 못하는 수가 있으니,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이원 분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면 선행에 대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어둠과 번뇌를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무엇이든 행하라’ 고 하였다. 자유에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며, 순수하게 사랑할 때에 가장 자유롭다.”
... 자유와 순명
“하느님께 대한 순명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순명할 상대보다 순명 자체에 의미가 있다.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듯이.”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순명은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나온 것이다.”
... 맺는 말
“피정을 통한 쉼은 이런 변화, 이런 녹아들어감을 위한 연습이다. 변화하도록, 녹아들어가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연습이다. 변화하지 않고 녹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곧 죽음으로 말라버리고 만다는 것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복음의 내용은 상호 변화를 요구한다.”
“모든 인간들 안에 스스로 변화하여 들어가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닮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은 하나의 변화다. 이 변화를 통해 부활의 삶이 다가온다.”
“이 연습장이 결코 우리의 힘만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그럴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연습장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연습장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다. 내 인생 연습장이 온갖 불평과 미움으로 가득찬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 인생의 아름다운 무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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