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알아보고자 질문하신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평소에 자기들이 들어서 알고 있던 대로 대충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보고하였는데 요약하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분"으로 압축된다.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며 생각들이다. 모두들 예수님을 훌륭한 인물로 생각은 하였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날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즉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분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대열 속에 끼어 있는 4대 성현 중에 한 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이시다. 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가?
나는 신자들과 복음 묵상을 나누거나 또는 피정을 함께 하면서 체험되는 것은 우리 자신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각자 다르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도 다른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참으로 놀랄 정도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님과 복음에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과는 전혀 맞지 않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
그러니까 복음을 복음으로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가 믿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가짜 예수님이라는 틀에 아니면 자기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속에서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복음을 읽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가짜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잘 믿었던 잘 못 믿었던 지금까지 자기 나름 대로 믿어 왔던 예수님이 가짜이시고 잘못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결국 복음은 복음대로 복음을 읽는 사람은 읽는 사람 대로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와 같다. 한번도 일치하지 않고 부딪치지 않은 채 각자 자기 나름대로 계속 달리고 있는 것과 같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마르코가 시작한 그 곳에서부터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내가 잘못 믿고 있는 예수님에게서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님에게로 탈바꿈 또는 출 애급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가 만든 가짜 예수에다 복음이 제시한 참 예수님을 끼워 맞추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 전체를 읽고 묵상하였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가 만든 예수님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같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소경이 눈을 뜨고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소경이었을 때와, 첫 번째 예수님이 그의 두 눈에 침을 뱉으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에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했을 때에 모습, 그리고 두 번째 예수님이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을 때에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되었을 때와는 서로 다른 차이가 있었듯이 우리가 복음에 눈을 뜨는 정도에 따라서 복음의 참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다 다를 것이다.
그것은 천차 만별일 일 수도 이다. 복음에 눈을 뜨지 못하고 항상 소경으로 머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한번 손을 얹으시자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아직 똑똑하지는 않고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똑똑히"보게 된 사람도 있을 수가 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고정관념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드로라고 해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고정된 자리에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였다면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자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았기 때문에 그만큼이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예수님이 제시해주시는 복음에로 돌아오지 않는 한, 눈을 뜨지 않는 한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늘 소경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을 수가 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이 그 옷을 당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복음은 새 부대에 담을 때 제 맛이 나는 법이다. 즉 자기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 또는 가짜 예수님을 버리고 복음이 제시해주는 예수님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참 예수님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과연 나는 예수를 누구라고 하는가? 이 말씀은 너에게 있어서 내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너의 삶에 어떤 존재인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마르코는 이 복음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적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내 인생의 시작이신 분, 예수님은 나의 삶에 가장 근본이시고 토대가 되시는 분, 예수님은 내 인생에 전부이신 분이시라는 뜻이다.
-◇ 유 광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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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오늘 나를 눈뜨게 하셨고, 내가 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관리해 주시는 내 삶의 주관자이십니다.
이웃 안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 나의 존재 이유를 알게 하시고 존재 가치를 부여해 주시는 분.
슬픔도 기쁨도 당신으로 인하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의 한 부분이 됩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가장 소중한, 나의 전부가 되십니다. 주님, 이것이 진정한 저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 누가 이렇게 말하네요. “너, 정말 그래?”
이런 의심을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님, 주님이신가요?
생각과 삶의 차이, 저도 그것 때문에 날마다 고민입니다. 그래도 주님이 안 계시면 제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으로만 가득하게 해주세요. 주님처럼 살게 도와주세요.
원 순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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