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9월 13일 야곱의 우물-마르 8,27-35/ 레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13 조회수410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분명한 정체성을 알고 산다면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흔들리지 않고 좌절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실 정체성이란 삶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내가 어떤 삶을 사는가?’라는 답을 말해 줍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곧 의사의 정체성은 사람들을 살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워 사회를 이끌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르 8, 27)라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속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예수님께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된 여론은 모두 특정인에 비유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28절)라는 표현은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당시 최고의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왕이나 가장 영향력을 가졌던 정치·사회 지도자들도 두려워할 만큼 그는 그 시대 최고의 인격자요 신앙의 지도자였습니다. 헤로데 왕조차도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6, 20)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존경받는 사람입니다.”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8, 28)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종으로서 기적과 능력의 상징적인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시대의 기적과 능력의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평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이야기한다고 전해드렸습니다. 예언자는 아마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여론에 가장 근접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자는 당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할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는 기름 부음을 받아 하느님께서 선택하고 인정하는 지도자 “예언자 가운데 한 분”(28절) 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여론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가타부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하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때 정열적이고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30절)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6, 41-44 참조) 사람의 의학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나병환자를 고치셨으며 (1, 41 참조) 말씀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5, 8 참조). 또한 죽은 라자로를 살리셨고(요한 11, 44 참조)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마르 6, 48-51 참조).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 30)라는 이 고백이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된다면, 우리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곧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데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나의 죄가 용서받고, 하느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악센트를 준다면 ‘너희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 제삼자의 입장에서 구경꾼의 모습을 취한다면 오늘 복음 묵상의 이 자리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물음을 듣고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이 물음을 듣고 부모나 형제나 다른 누구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스승님 또 주님”(요한 13, 13) 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절대 순종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이라면 비록 제대로는 못해도 해보려고 애쓰는 몸짓이라도 하고,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을 내 삶의 이정표로 삼고 닮아 가는 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 생각합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나와는 상관없는 그냥 성경에서 말하는 인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베드로의 고백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까 아니면 내 삶의 일부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결정하게 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모든 일을 결정합니까?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곧 나의 신앙고백이 되도록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주신 하느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