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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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처형 방법은 예수님 당시 가장 무서우면서도 가장 흔한 사형 제도였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와 셀레우코스 왕조, 유다인·카르타고인·로마인들 사이에서 기원전 6세기경부터 기원후 4세기에 널리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던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십자가에 수난당하시고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과 십자가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권력가가 주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8, 18)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8, 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가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그 권력가는 영생의 길을 묻기만 하고 돌아갔을까요?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지만 권력가는 세상의 지위와 명예, 그에 따른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 재물에 대한 그 모든 욕망을 온전히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 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자신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를 예수님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삶의 의욕도 없고 성취 욕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자기중심적 삶이나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고, 명예나 욕심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마르 1, 18) 따랐고, 세리 마태오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돈 잘 버는 직장을 그만두고 “일어나 그분을”(마태 9, 9) 따랐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루카 9, 23)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란 희생의 짐을 말합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 문제입니다. 고통도 죽음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각 사람의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듯이 각자의 십자가는 크기도 모양도 무게도 모두 다릅니다. 사람은 어차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 있는 고통인가, 무의미한 고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고생이고, 직장 생활도 고통의 연속입니다.
사업을 해도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가장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라면 남을 위한 희생, 남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참고 져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벗어버리려고 다른 길로 피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가는 선교여행 길도 핍박과 질병이라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 14)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앞길에 십자가를 두셨지만 결코 억지로 지우시지 않고 또 억지로 지는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앞에 십자가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놓인 십자가를 보시면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 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뭇사람의 비방과 조롱을 받으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셨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힘들고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칠 수도 있고 중간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신 예수님은 한번도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 2) 신앙생활은 평생을 달려야 하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이 먼 길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대로 따르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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