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 정체성 찾기
제가 이번 여름에 한국에 들어온 첫 번째 이유는 귀의 이명을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백하는 것이지만 귀가 조금 들리지 않고 또 이명이 들리는 것은 외적인 핑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다면 공부 중간에 들어와 쉬게 해 달라는 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명이 계속 들리기 때문에 3개월을 낭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 매우 만족하여 참 잘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오고 싶었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사제로서의 저의 정체성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는 몰랐던 것이었는데 사제가 되고 다시 공부하러 나가니 한국에서 2년 동안 했던 사제로서의 삶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이 사제로서 대접받고 인기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적지 않게 걱정하며 묵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음을 느낍니다. 저는 다시금 사제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렇게 힘을 얻었고 이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할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제가 되어 2년 동안 행복했던 시절들을 돌아보면 사실은 매우 피곤했었습니다. 심지어 첫 본당에서 하루에 미사 다섯 대를 하다가 마지막엔 너무 기계적이 되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라고 읽고 무심코 성작을 들어 올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수면 시간도 부족하여 성당에 성체조배하려고 앉기만 하면 잠이 들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병원에 링거를 맞으며 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렇게 너무 힘들어서 그 성당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표정관리가 안 되어 항상 웃고 다녀 신자들을 섭섭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떠나는 날 아무도 울지 않으셨습니다. 한 분이 우셨는데 딸이 이혼한다고 해서 우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든 2년을 보냈지만 유학을 나가서 이때가 그리워 6개월간은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생했던 시절이 그립고 또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까요? 아마 제가 사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학 나가서, 미사도 신자들과 하지 못하고 고해성사도 주지 못하고 강론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가 자주 던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제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들어온 것이고 지금도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처럼 아무 하는 일 없지만 사람을 만나느라고 잠 잘 시간도 부족합니다. 그냥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고해성사도 주고 미사도 해 주고 강론과 강의, 상담을 해 줄 때도 있습니다.
3개월간 매일같이 바쁘게 살아서 주위 분들은 오히려 병을 고치러 화서 병을 얻어가겠다며 걱정하시지만 저 나름대로는 사제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이번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된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합니다.
사제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역시 ‘신자들’을 만나야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병자들을 위한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의사라 하더라도 환자들을 만나지 않고 골방에 혼자 있기만을 원한다거나 건강한 사람들만 만난다면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큰 죄인이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근거를 들어 당신이 구원자로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함을 설명해 주십니다. 사실 죄인들이 없다면 구원자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성자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정체성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면 찾을 수 없고, 남자라는 정체성을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자녀가 없는 부모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자가 없는 사제도, 병자가 없는 의사도 없으며 죄인이 없는 구원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대로라면 신앙인은 누구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신앙인임을 느끼고 싶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질적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저는 며칠 뒤에 신앙이 없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짧은 여행을 할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를 떠나서 한 명의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서의 제가 필요한 곳은 신자들 가운데이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있어야 할 곳은 믿지 않는 사람들 속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우리들과 같은 부류 안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습니까? 왕따 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가 가장 먼저 다가가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의사가 병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처럼, 돈이 가난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나’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