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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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겨울 다섯 번째 카미노(길,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일컬음)중 늦저녁에야 산간벽지 순례자 숙소에 닿았다. 그날 우리는 1,200미터 산정에서 눈보라를 만났고 다리가 아팠으며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썰렁한 무인 숙소엔 달랑 마늘 한 통이 있었다. 멀찍이 인가 서너 채가 어둠에 묻혀 있었으나 빵가게를 기대할 수 없었다. 물과 빵을 비축하는 건 여행자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수칙이다.
그런데 나는 짐무게가 두려워 이를 어겼다. 어떻게 되겠지, 태평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상황에서도 카미노가 처음인 동행이 기도부터 드리는 게 비위가 상했다. 저녁을 굶고 잤고 다음날 마늘 한 통을 구워 동행에게 네 쪽을 건네고 내가 세 쪽 먹었다. 참으로 볼품없는 끼니 때움에 나는 또 부아가 솟구쳤다. 앞장서 빗속을 묵묵히 걷는 동행이 기도하리라 넘겨짚고 “마늘 네 쪽을 감사하는 거예요?” 이기죽거리고 말았다. 그것은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두절미 물고늘어져 들이대는 심통이었다.
빵 한 쪽에 이렇듯 연연하는 나는 한때 붉은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겨버린 에사우의 참을성 없음에 크게 혀를 찼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신심의 세 살배기, 이를테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닿는 것’이 내 힘에 부치는 감사·겸손·온유·인내의 연속이어야 한다면 차라리 눈보라 속 1,200미터 산정을 되넘어가겠다는 식의 어깃장이다. 그 어린것이 순례의 끝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 안에 있는 사도 야고보 성상 앞에 서서 뜨거운 침을 거푸 삼켰던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난호(서울대교구 구로1동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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