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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24 조회수1,214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 25 주간 목요일 -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며칠 전에 가까운 동기 사제관에서 밤에 무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차 뒤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고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 볼 때는 안 무서운 척 했지만 저도 모르게 팔찌 묵주를 빼어 들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사제가 되면 귀신을 만나도 절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 주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에 사제관으로 공소 회장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병자성사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며 차를 태워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 귀신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혼자 당당히 들어갔고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닦아보니 피였습니다. 신부님은 위쪽을 올려다보니 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천정에 붙어서 자신의 혀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뻘겋게 된 눈으로 신부님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선배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제가 되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매우 시골이었습니다. 밤에 집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도 20분가량은 불이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야했습니다.

복사단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 오가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골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러보기도하고 노래를 크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도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데 검은 마귀같이 생긴 것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주춤 했지만 용기를 내어 더 가보니 나무에 걸려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두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많으신 분이지만 헤로데는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깁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있는 ‘내적 법원’, 즉 ‘양심’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내립니다. 이 법정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죄인으로 찍히고 나면 ‘벌’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실 이 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반에서 시험을 잘 못 보아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때리려고 할 때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그 마음입니다.

유다처럼 그 벌을 못 기다리고 자신 스스로 그 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이나 상황이 자신에게 벌로 다가올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위축되고 두려워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집니다. 벌을 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또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사람으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넘어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그러면 사람이든 귀신이든 두려워 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하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죄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부모님도 자녀들을 혼내는 이유가 다 자녀가 다시 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다시 잘 하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어제 식사하는데 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막 나무라서 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도 다시 엄마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것입니다. 야단맞았지만, 그래서 울고 싶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엄마 품밖에 없었나봅니다. 엄마는 야단친 것이 미안했는지 다시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모습이 참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가 미워서 도망가 버렸다면 엄마는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잘못 하였어도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부모님께 예전처럼 달려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가끔은 매를 들 때도 있지만 두려움 없이 당신께 달려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하느님께 얼굴을 파묻으면 세상의 두려움은 다시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마치 아기가 부모가 곁에 없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나를 지켜 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부터 시작됩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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