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염장이와 상여꾼의 투명한 슬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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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요하 | 작성일2009-09-24 | 조회수51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어제 최종하 형제님이 올리신 <6대째 교우가정을 만남은 나의 행운이었다>라는 제목의 연령회장 봉사 관련 글을 오늘 읽다가 불현듯 옛날에 발표한 제 글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1989년 '한국가톨릭문우회'는 그 해 한국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를 기념하여 『작은 사랑이 아름다워라』라는 문집을 간행하였습니다. 문집의 이름은 정호승 시인의 글 제목으로 했고…. 그 문집에 저는 <염장이와 상여꾼의 투명한 슬픔>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습니다. 그 글을 찾아서 한번 읽어보니 '가톨릭 굿 뉴스'의 형제 자매님들께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불현듯 옛날(20년 전)의 글 하나를 기억나게 해주신 최종하 형제님께 감사 드립니다. 염장이와 상여꾼의 투명한 슬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죽은 이의 시신(屍身)을 만지고 상여를 메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벌써 25년 전에 시작된 일이다. 지금은 내가 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우리 태안 본당이 그때(1964년)는 갓 본당으로 승격된, 본당 설립 원년(元年)의 해였다. 신자 가정이라고는 통통 털어 봐야 몇 집밖에 되지 않았고, 예비신자들까지 합쳐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빈한(貧寒)하기 그지없는 한 신자가 세상을 떠난 판국에서는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르는 일에 나이 어린 나까지 동원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이 열여섯, 아직 홍안(紅顔)을 벗지 못한 시기에 시신을 만지고 상여를 메기 시작한 그 첫 번째의 경험은 내게 있어 매우 소중하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다 죽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시신을 맨 처음 대할 때의 마음 섬뜩함과 시신에 손을 댈 때의 용기와 두려움, 그 시신의 앙상한 다리에서 내 손바닥에 느껴지던 차갑고 껄끄럽던 촉감 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염(殮)을 돕는 일을 마치고 나서 비누칠을 싹싹 해서 손을 여러 번 씻었는데도 그 손으로 음식을 먹기가 왠지 꺼림칙하고, 차갑고 껄끄럽던 시신의 감촉이 여러 날 동안 그냥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던 기억이 지금도 분명해서,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교복을 입은 채로 상여를 멜 때는 차라리 자랑스럽고 흥겨운 기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죽은 사람 시체를 만지고 상여를 메고 한 일을 열심히 떠벌리고 자랑을 한 일도 생각이 난다. 아무튼 그때부터 시작된 시신을 만지는 일과 상여를 메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 물론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내 손으로 정성껏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때로는 묶기까지 해서 관에 넣어 떠나 보낸 시신들이 이제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우리 본당에는 아직 염습 능력을 가진 여성 교우들이 없기 때문에 여성 교우의 주검도 남자들이 해야 하는 고로, 시신으로 내 손과 더욱 알뜰히 인연을 맺고 떠나간 영혼들이 더욱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별의별 시신들을 다 접했던 것 같다. 마스크를 쓰거나 손에 장갑을 끼고 하는 법 없이, 어떤 조건에서도 그대로 맨손으로 하는 일이어서 여러 가지로 고통스러웠던 경험도 많다. 손바닥에 허물이 묻어나는 시신을 대한 적도 있고, 사타구니 께를 만지다가 배설물을 손에 묻힌 일도 있고, 뱃속에서 끄르륵끄르륵 소리와 함께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검게 썩은 퇴적물을 탈지면에 받아 낸 것이 비료 부대로 하나 가득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염습을 하는 일이 아주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어떤 상태의 시신, 어떤 조건에서의 염습이건 간에 얼굴 찌푸리는 법 없이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그리고 제법 능숙한 솜씨로 일을 해낸다. 시신을 대할 때마다, 이 시신이 살아 있을 때는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던 몸, 주님의 성전이었다는 엄숙한 사실을 상기하곤 한다. 예수님의 몸과 '한 몸'을 이루었던 거룩한 몸, 성체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비록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던 몸은 아니고 죽음 직전에 대세를 받은 시신일지라도, 이미 성세로써 거룩하게 된 주검임을 생각한다. 성호를 긋고 나서 시작하는 염습 행위는 그만큼 경건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에서 끝까지, 염습을 하는 동안 내내 기도하는 마음이기를 원한다. 향을 피워놓고, 향의 연기와 내음이 방 안에 퍼져 있는 가운데서, 시신의 옷을 벗기고 온몸을 성수로 닦을 때는 정녕 경건한 마음이고 기도하는 마음이다. 주위가 정숙하면 정숙한 대로, 울음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가족 중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있어서 참견이 자심한 경우에도 평정과 여유를 잃지 않고, 참견을 수용할 건 수용하면서 너끈히 일을 해낸다. 일을 마치고 성호를 긋고 나와서 손을 씻은 다음 음식상 앞에 앉아 시원하게 막걸리를 마실 때의 기분은 참으로 상쾌하고 뿌듯하다. 그런데 염습을 하는 동안 내내 경건한 마음, 기도하는 마음이기를 원하면서도 때로는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허무함과 심란 무성한 슬픔에 젖기도 한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로 내겐 슬픔이, 눈물이 더욱 많아졌다. 염습을 하다가는 불현듯 내 아버님의 죽음을, 그 가련한 시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짓기도 한다. 지난 86년 초에 66세로, 사셔도 한참을 더 사실 그 연세로, 지금의 착한 며느리도 귀여운 손녀도 보시지 못하고 세상을 뜨신 아버님…. 평생을 고생고생하며 가난하게 살다 간 사람의 시신을 대할 때는 더욱 아버님 생각이 난다. 오랜 병고로 시달리다 죽은 가련한 시신을 대할 때는 더욱 아버님의 시신 모습이 떠올라서 한결 눈시울이 젖는다. 오래 병고를 겪으시기만 했을 뿐 큰 병원 한번 가보시지 못하고 고스란한 가난 속에서 지레 체념으로 그냥 그대로 죽음을 맞으신 아버님…. 아버님을 생각하면 나의 무능과 우둔함과 불효가 너무도 슬프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 마흔의 나이로 결혼하여 딸을 하나 얻은 나는 요즘 한창 재롱이 귀엽기 그지없는 딸아이 때문에 또 한끝 마음이 아프다. 이 천진난만한 재롱둥이 어린아이에게도 세상을 사는 즐거움의 한 옆으로 갖가지 고통과 슬픔들이 앞날에 예비 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사는 데 따르는 갖가지 고통과 슬픔들 중에 아비를 여의고 어미와도 헤어지는 슬픔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가엾기 그지없다. 죽은 이의 시신을 염습하고, 그의 영혼을 위해 연도를 하고, 장례미사 때 사회를 보며 슬픈 노래를 선창하고,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고 장지(葬地)에까지 가서 하관 예절을 하고…. 그러면서 내 아버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앞으로 언젠가는 내게도 찾아올 죽음도 생각하고, 내 자식의 슬픔도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슬픔이 끓어올라서 눈시울이 젖지 않을 수 없다. 유족들과 거의 동일한 슬픔을 공유한 가슴으로 나는 모든 예절들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냥 무한의 허무함과 슬픔에만 빠져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 슬픔들은 매우 청결하고 투명한 거울과도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신앙을 비춰 주는 거울로서 내 슬픔은 존재한다. 그 분명한 슬픔으로 해서 나는 정녕 극진한 마음으로 시신 염습을 하고 연도를 하고 성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슬픔들을 찬찬히 되새기다보면 내 신앙의 나태함에 대한 반성이 우러나오기도 한다. 내 육신 삶의 편안함과 세속 삶의 이익 쪽에 경도되어 갑자기 생겨나는 교우 초상을 두려워하고 곤혹스러워하기도 한 죄들에 대한 반성이 촉촉이 가슴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그리고 <흙빛문학회>의 회장으로서 이 지방에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쌓고 유지 대접을 받고 있는 처지인 내가 교우 초상이 났다 하면 염장이 노릇에다가 상여를 메고 하는 것을 의아해 하고 못마땅히 여기는 친구들도 있기는 하다. 지지난해 화려하고 당당하게 시인으로 나선 한 후배는 나의 그런 행위들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나에게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그게 바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라는 말로 나는 간단히 응수하고 말았지만, 내 여유 있는 태도와는 달리 내심으로는 쾌치 못한 기분이었다. 물론 세속 삶과 연관되는 차원에서의 곤란하고 곤혹스러운 마음이며 사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계속하는 한에는, 그리고 우리 본당 공동체의 한 성실한 일꾼으로 계속 존재하는 한,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염장이와 상여꾼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모든 일들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늘 기꺼운 마음이기를 원한다. 또한 그런 일들에서 항시 내 신앙을 맑게 비춰볼 수 있는 내 청결하고 투명한 슬픔들을 소중하게 포유하고 간직하기를 원한다. 내 비록 어떤 시신도 만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아내가 배 아플 때 아내의 엄지손가락에 바늘 한 방 냉큼 찌르지 못해 쩔쩔매기는 할 망정…. * (1989년 <한국가톨릭문우회> 문집 『작은 사랑이 아름다워라』에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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