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직자라고 모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
---|---|---|---|---|
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09-09-24 | 조회수56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저녁 제사 때에 나 에즈라는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에즈라 9:5-9) 8세기의 유명한 무슬림 신비주의자 아부 벤 아뎀(Abu Ben Adhem, ?-777)은 왕좌를 버리고 금욕주의자가 되어 신(神)께 자신을 바쳤다. 별이 빛나는 밤에 메카에 있는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시(神聖視)하는 카바(Kaaba) 신전(神殿) 가까이에 도착했다.
신전은 사막 위에 있었으므로 안간힘을 쓰면서 신전 문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기도했다.
“오, 신이시여! 저가 당신께 항상 순종할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소서.”
말이 끝나자 하늘에서
“아부 덴 아뎀이여, 너는 나의 거룩한 뜻을 어기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내가 모든 종들의 그러한 간청을 들어 준다면
내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전혀 없지 않겠는가?
내가 그들을 얼마나 용서하고 있는지를 네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루카 6:36)
신(神)이 말한 것은 “많은 수도자들이 신의 거룩한 뜻을 어기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지도 못할 사람이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가톨릭 사제의 꿈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시복(諡福) 시성(諡聖) 제도가 없다. 그렇다고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성인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복 시성 제도를 알면 가톨릭 사제들이 성인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 의의: 시복 시성이란 성덕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나 순교자에게, 탁월한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복자(福者)나 성인(聖人)의 품위에 올리는 예식을 말한다.
2. 조사: 먼저 고인(故人)의 성성(聖性)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면, 지역 주교는 시복 준비 조사 위원회를 결성하여, 교황청에 시복 조사를 건의하기 위한 일반 자료 조사 과정을 시작한다. 고인의 언행, 저서, 기적 사례 등을 엄밀히 조사하여 교황청 시성성에 보고한다. 그 후 교황의 조사에 대한 허락이 있으면, 교황청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다. 이때 시복 대상자에게 가경자(可敬者)라는 존칭이 주어진다.
그런데 시복 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있어야 하는데
새로운 법에서는 순교 사실만 확인되면 순교자는 기적 심사가 면제되도록 하였다.
3. 시복: 덕성이 확정되고 그분을 통한 기적이 두 가지 이상 있으면, 의사나 병리학자 등이 기적에 대하여 확실히 검토하며,
기적이라는 것이 확정될 때까지 많은 관계 전문가들의 조사와 재판을 계속한다.
그리고 기적이 확인되면, 교회는 그를 복자로 선언(諡福)한다.
4. 시성: 그 후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인정될 때, 그를 성인으로 선언(諡聖)하고 의식을 행한다. 시성은 복자에 한해서 행해진다. 그리고 복자는 그 공경이 어느 지방이나 단체에 한하나, 성인은 전 세계 어디서나 누구든지 공경하게 된다. 그런데 시성은 교황만이 할 수 있는 무류성(無謬性)의 행위이다. 5. 축일: 또한 미사 경본이나 사제의 성무 일도에 기도문이 삽입되고, 전례력에 축일이 도입되며, 성체 행렬에서 그 유해를 공경하게 된다. 성인들의 축일은 대개 사망일로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세례를 받는 자들은 이날을 영명 축일로 정하게 된다. 사람은 살고 있는 동안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을지 어떨지, 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다.
유다도 그리스도에 의해 열 두 제자로 뽑혔을 때는 좋은 인간이었다.
적어도 성인이 될 자격은 있었다. 그러나 유다는 성인이 될 수 없었다.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죽고 나서의 일이지만, 우리는 좋은 사람이 죽어서 참으로 천국에 들어갔는지 어떤지 확인할 수가 없다.
어떻든 성인이라고 하면 “우리의 모범이 되는 천국에 있는 분”이라고 교회에 의해 선언된 사람을 말한다.
가톨릭교회의 치부인 대사부(大赦簿, 개신교에서는 면죄부라고 하지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으므로 사제가 죄를 사(赦)해주었을 리가 없다. 개신교의 경우 고해성사제도가 없다는 것은 죄를 고백할 기회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가톨릭에서 사제가 고백성사를 주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된다) 판매 사건의 사제가 하늘나라에 갔을까? 성직자가 악에 물들면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평신도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악에서 벗어 난다.
한평생 성실한 학자였던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는 그의 생애에 오직 한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작품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기적인 격정은 이미 사랑이 아님을 나직이 역설하는 이 철학적 사랑이야기 외에도 그는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동양 고대성전 전집』등의 저서를 남겼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리그 베다>를 간행했으며 1875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독일인의 사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신학자들이 우리들로부터 종교란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이 도리어 신기롭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신학자들에게 ‘그만하십시오.’하고 말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우리들로부터 종교를 몽땅 빼앗아 가버렸을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성직자(聖職者)가 필요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즉 그리스도교의 신부나 목사, 바라문교의 승려, 불교의 승려, 라마승, 바리사이 율법학자 같은 성직자들에 의하여 피해를 입고 파괴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로 다투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이 복음서로부터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을 감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진리를 싣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바쁩니다. 그러나 그런 증명은 그들이 참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놀라운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령을 받지 않은 성직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영국의 성공회 주교였지만 1918년 로마 가톨릭 신부 서품을 받은 로널드 녹스(Ronald Knox, 1888-1957) 몬시뇰이 성체성사에 관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0년의 역사 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주요한 계명과 수많은 부르심을 끊임없이 무시해왔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모자라서 예수님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 조언을 듣고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들은 척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대부분 원수를 사랑하고, 왼 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내놓고, 일곱 번씩 이른 번 용서하고, 성체성사를 모시기 전에 먼저 반목하고 있는 형제에게 가고, 믿음과 같은 수준으로 의로운 행동을 하고, 교리보다 자비를 더 높이 사며,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질투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개인이나 단체가 믿음이 없이 자기 변명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체를 기념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함께 만나 주님의 말씀을 나누며 예수님을 기억하며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예수님의 계명만은 끊임 없이 지켜왔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교회와 저에게 따라다니는 이 악령 같은 죄의식에 더욱더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유로 저는 매일 가능할 때마다 성체를 기념하려고 합니다.
성체 안에는 많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즉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육화가 계속 실현되게 하며, 하느님께서 육체적으로 우리를 껴안아 주시게 하고, 공동체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시며,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양을 공급해주시는 새로운 만나이며, 신자로서 함께 식사를 하게 해주시며, 전례 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게 하며,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의 선물이기도 하며, 제자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초대이기도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는 연회이기도 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거행하는 전야제이기도 하며,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치는 사제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순전히 저 개인적인 목적으로 매일 성체를 기념합니다. 즉 저가 참다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며, 이 때에 저의 신앙심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저가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도덕이나 영성의 깊이를 알지 못하지만 저가 미숙할뿐더러 때로는 의심을 하고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만은 깨어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규칙적으로 성체를 기념합니다. 그리고 늙어가면서 성체성사는 저에게 더욱더 의미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고 종교를 잘 알지 못하고 인생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많이 알게 됨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것들이 이제는 하느님의 길에서 많이 멀어져 자가당착(自家撞着) 속에 살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든 것이 신비이고 우주와 영적인 세계의 방대함을 깨달을수록 하느님을 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초월해 계시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고 느낄 수조차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는 있습니다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학 면에서나 교회학 면에서 더욱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모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의식이므로 하느님을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 나이 들어감에 따라 위선 속에 살았다는 것과 인간은 연약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 자신이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도 저가 알고 행하고 있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 우리들에게 당신을 기념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 돌아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들이 행해야 할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고 하신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신랑신부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셨지만 본 훼퍼(Dietrich Bonheffer)가 결혼에 대하여 혼인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잘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결혼을 지속시킬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결혼이 사랑을 지속시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담아 행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들은 믿음, 자선, 용서, 소망을 지속시킬 수는 없지만 성체성사를 통해서는 지속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을 수도 없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길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믿음이 있어야 도덕적이 되고 인간적이 되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를 빠지지 않고 모시게 되면 그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