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리서치에 의하면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이탈리아에서 예수님보다도 존경을 받는 성인이십니다. 내년엔 교황님이 직접 가셔서 그분 기념 미사를 집전하시겠다고 발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상의 비오 신부님도 처음부터 삶이 순탄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사제가 되자마자 오상을 받고 많은 어려움에 휩싸이셨습니다. 오상이 마귀의 힘에 의해서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는 조사를 마치고 비오 신부님의 오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근거가 희박하여 신자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게 합니다. 당사자는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런 방침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비오 신부님은 아무런 말없이 2년 동안 경당에서 복사와 단 둘이서 미사를 거행합니다. 사제가 혼자 미사 한다는 것은 마치 반쪽이 된 느낌과 같습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은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무슨 뜻이 있겠거니 하십니다.
그의 전기에 보면 비오 성인도 끊임없이 마귀와 싸웁니다. 마귀는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 오상이나 기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을 품게 합니다. 교회의 결정을 믿는다는 것은 곧 마귀에게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명성보다는 교회의 뜻을 따를 줄 알았습니다.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곧 자신이 마귀에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자신을 버리고 더 큰 뜻을 따를 줄 알았습니다.
사실 오상 때문에 시성 조사 위원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실제로 그 분을 성인품에 올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순명 때문입니다. 이 분의 순명으로 현재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말하는 모든 집단들이 거짓임이 증명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고 그런 권위를 갖는데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스스로를 박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태리 시골본당에 갔더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 아주머니께서 ‘나주 성모님’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부러운 눈빛으로 자신은 그 곳에서 오는 회지를 받아본다고 하였고 그 마을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나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크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주를 꼭 한 번 순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 성모님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기적’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두 번씩이나 방영했고 교황님 앞에서 실제로 성체가 피가 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나주 율리아 자매의 사적 계시는 마귀에게 속은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나주 율리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교령을 믿으려하지 않고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얻은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교회의 교령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결국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은총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만약 그들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을 믿었었더라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그렇게 모두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 하느님이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따르던 분이 그런 죽임을 당한다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리한 대답을 들을 바에야 아예 묻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도 또 그것에 대해 여쭈어볼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제가 된다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믿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합니다.
절벽에서 나무를 잡고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살려거든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하신 것처럼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고 그 분의 말씀이 진리임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믿었다면 그 상황이 왔을 때 덜 당황할 수 있었을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흥분하지 않고 담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름을 한국에서 지내면서 많은 신자 분들을 만났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분들이 공통적으로 크고 작은 한 가지 이상씩의 어려움들을 안고 생활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이런 불행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이용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다 주님의 뜻이 있겠거니 하면서 믿음으로 극복하고 계셨습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을 선택함으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신비로운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나라를 얻을 수 있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