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의 한계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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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화면에 낙타 시장이 비쳤는데 한 사람이 낙타를 모질게 때렸다. 낙타는 매를 피하느라 긴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어떤 이가 때리는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매질하던 이가 대답했다. “나는 이 낙타와 오래 같이 살아 깊이 정이 들었다. 이젠 팔지 않을 수 없어 정을 떼려고 어제부터 때렸는데 아직도 나를 따라오려 한다.” 끝내 그의 눈이 젖었다. 자막을 읽던 나는 낙타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항상 다정하던 주인이 왜 때리는지도 모르고 호되게 맞으면서 낙타는 얼마나 황당하고 서럽고 막막했을까? 그 막막한 낙타의 눈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
소통은 이만큼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절벽일 수 있음에 어찌 감히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기 쉽겠는가. 그분의 위대하심에 놀랄 수는 있다. 그러나 정작 귀담아들어야할 말씀(루카 9, 44 참조)을 알아듣기는 어렵다. 제자들의 한계이고 나의 한계이며 곧 ‘들을 귀’의 한계다. 그분은 끊임없이 여러 방법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려 하셨다. 마침내는 최대한 당신을 낮추어 당신의 아들로 다가오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상은, 아니 나는 매 맞는 낙타, 그분의 침묵이 답답하고 노엽고 어리둥절해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
그분은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지만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의심을 품으면 두려움만 커지므로 그분을 따르려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기에게 닥친 고통에는 그것을 감내할 힘까지 곁들여 주어진다는 역설에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침묵 속에서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만 놓치지 않고 견디면 된다.
곁눈 팔지 않고 곧은 앞길만 보며 버텨내는 이에게 당신의 신비를 열어 보이신다. 그 신비 안으로 그를 끌어들이신다. 하마 아득하다, 막막하다, 엄살해선 안 된다. ‘한 생각’ 돌리면 ‘천 년이 하루’인 것. 유독 참을성 없는 나는 일쑤 그 ‘한 생각 찾기’에서 맥이 풀린다. 그런 때 내리 두세 시간 성경을 읽으라던 한 수도자가 있었다. 그대로 해봤고 몇 번 안정을 찾은 경험도 있다.
이난호(서울대교구 구로1동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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