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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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9-09-28 | 조회수1,455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연중 제 26주간 월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큰 사람에 대하여 논쟁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의 논쟁은 지금 저희들처럼 학식이 많은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등 갖가지 요소들을 큰 사람의 요건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논쟁을 하는 것은 제자들 마음 속에 큰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고달픈 것은 서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경쟁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을 큰 사람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오늘 복음은 이런 잘못된 생각을 시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하신 이 말씀은 바보 같은 삶을 산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며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보 같은 삶을 산 사람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부동산 투기 한번 못한 자신을 한탄하여 바보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며, 또는 바보처럼 병역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경우를 바보 같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남과 비교하여 경쟁에서 뒤 떨어진 것을 바보 같았다고 할 수 있으나 바보의 의미는 이런 뜻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하신 말씀처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을 바보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도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보도에서처럼 신생아를 사고파는 천인공노할 사건도 입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신생아를 사고파는 일이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입양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받아드리는 경우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자비를 말씀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은 자비를 실천하여야 예수님을 받아드리는 것이고 하느님을 받아드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그만큼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으므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드리고 하느님을 받아드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비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고 하느님의 받아드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무리 신심이 깊다 할지라도 자비를 실천할 줄 모르면 예수님과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자비를 빼버리면 과연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요?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며 다른 이유가 또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 각 종교단체에 세금감면등 여러 혜택을 주는 이유는 국가를 대신하여 자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목하는 점은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요한의 얘기는 요즘 의미로 해석하면 이단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자비의 가르침과 이단논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비를 실천하면 모두가 나를 따르는 것이며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 나를 배반한 것이다 는 말씀입니다. 불쌍한 이웃이 있으면 도와줘야 합니다. 이런 자비를 실천하는데 신학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교리와 교회법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런 신학과 교리와 교회법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신 말씀을 거역하는데 일조하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모두가 자비를 실천함으로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며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가서 구원받고, 연옥영혼들이 우리의 기도로 구원받고 하는 등 이런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이라면 세계 4대성인으로 온 인류가 추앙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온 인류가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온 인류가 예수님을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더 극진히 추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추앙하는 것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은 간 곳 없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성모님께 기도하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이런 잘못된 믿음만이 팽배해 있으며 이런 자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참 그리스도 사람들이 배척당하는 오늘의 현실을 개탄하며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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