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0.4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창세2,18-24 히브2,9-11 마르10,2-16
"일치의 여정 중에 있는 공동체"
어제는 토요일 추석이었고
오늘은 연중 제27주일이자 저의 영명축일입니다.
주일에 가려, 주일에 묻혀 보이지 않는 성 프란치스코 축일입니다.
매년 영명축일이 주일과 겹쳐
주님께 가려, 주님에 묻혀
평범히 자취 없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가려버리는 삶이 아니라
주님만이 환히 들어나는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주님을 가려버리고 내가 들어나려 하기에
자신도 힘들고 공동체도 힘들게 됩니다.
주님 안에 사라지는 것은
바로 주님의 몸인 공동체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으로 주님 안에 사라질 때
주님의 영광만이 환히 들어나는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아닌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공동체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가정공동체나 수도공동체의 일치의 원리는 똑같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듯
성격이, 마음이, 취향이, 이상이 같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공동체의 일치는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부부공동체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이심이 분명히 들어납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분명 하느님의 계획안에 한 몸의 부부가 된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신자공동체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루어 진 것이니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 화해하고 용서하며
일치를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일치를 원하십니까?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 이것 하나뿐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저절로 공동체의 일치는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나,
거룩하게 된 우리들은 모두 한 분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큰 형님으로 모신 형제들의 공동체가
바로 믿는 우리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래서 여기 우리 수도가정공동체
매일 끊임없이 평생을
이 하느님의 성전에서 하느님께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하여 주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의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요즘 신앙이 없는 젊은 부부의 결혼이 참 위태롭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일치의 중심, 함께 바라보는 방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 부부 같으면 불화의 위기 시 잡아당길 세례명의 끈이라도 있는 데
이들은 도대체 잡아당길 끈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도반(道伴) 형제들과 함께 일치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는 평생과정입니다.
결혼했다하여 한 몸의 완성이 아니고,
종신 서원하여 수도공동체에 합류했다 하여
한 몸 공동체의 완성이 아닙니다.
마치 봄, 여름, 가을 계절이 지나가며 열매들 익어가는 과정과도 같고,
끊임없이 땅 속 깊이 뿌리 내려가는 과정 중에 있는 나무들과도 같은
일치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런 고난의 과정을 겪어 완전에 이르셨습니다.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인 예수님을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완성에 이르는 고난의 여정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혼해서 안 된다는 법조문 같은 말씀이 아니라
끝까지 일치의 여정에 충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혼이나 수도원을 떠남으로 인한 후유증이 평생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바꿔서 안 될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본처를 바꾸는 것이요
또 하나는 물길을 바꾸는 것이라 합니다.
조강지처를 버려 잘 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물길을 바꾸는, 대운하의 전초작업이라 의심 받는 4대강 정비 사업이
참 무모하여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부부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원리는 똑 같습니다.
끝까지, 죽을 때 까지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주님과 함께 일치의 여정에 충실 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결국 끝까지 참는 자가 승리하고 완성에 도달합니다.
‘뿌릴 씨를 가지고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6) 라는 시편 말씀처럼
실제로 저는 그런 부부들을 수도자들을 보았고 알고 있습니다.
평생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의 여정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바꿔야 할 것은, 탓할 것은 환경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입니다.
내 마음이 새로우면 매일이 새 하늘, 새 땅이요,
늘 봐도 새 환경, 새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이요,
상대방의 마음을 넓히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 넓은 내적 공간을 지닐 때
좁은 공간에서도 넓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 새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런 어린이와 같이 열려있는 겸손한 이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결국 가정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어린이와 같이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평생 수행자들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식에 굶주려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진리에 굶주려 있습니다.
정말 사랑과 진리로 충만한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에 살고 싶어 하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소원일 것입니다.
어제 책을 읽다가 번쩍 눈에 뜨인
‘선열위식(禪悅爲食)’이란 불가의 단어였습니다.
깨달음의 기쁨을 밥으로 삼는 다는 말입니다.
밥보다 사랑과 진리의 기쁨이 전 존재를 충만하게 합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가슴은, 머리는 밥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가슴은 사랑으로, 머리는 진리로 채울 때 비로소 충만한 삶에 기쁨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공동체의 형성에 미사보다 더 좋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미사가 아니 곤 여기 이렇게 모여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까?
날로 삭막해지는 사막 같은 세상에
이렇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성체를 모실 수 있는
미사와 같은 축제가 어느 종교에 있습니까?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일치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어린이와 같은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한 몸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