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 말 미국 뉴욕 출신의 20대 젊은 신학생이 수도회 명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한국 땅을 향한다. 그때는 직항로가 없어 시애틀을 경유해 태평양의 섬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고 다시 한국행 항공기를 일주일 만에 타고 겨우 서울에 도착한다.
그후 봉사활동을 마치고 프랑스 신학교로 가 신학과정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196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에 부임한다. 그러나 바로 고열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져 미군의 도움을 받아 부평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러고는 소아마비 판명을 받고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특히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70 - 90년대 한국 노동사목을 이끌어 나간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노동사목회관을 지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목을 하고 계신다. 그분께는 항상 시련이 따랐고 특히 열세 번의 전신마취 수술을 했으며 지금도 1주일에 세 번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그럼에도 지팡이를 짚고 날마다 회관 주변 동네를 산책하시며, 앉아 있을 힘만 있어도 미사를 드리시고 간혹 건강이 호전되어 식사 초대를 받으면 남은 음식을 싸 갖고 가시어 한 끼 식사로 드신다. 그렇게 절약된 예산을 모아 지난해에는 베트남공동체에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하도록 희사하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겉치레가 아니라 속에 담긴 것을 베푸는 행동으로 세상이 깨끗해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시는 신부님이다. ‘70대인 신부님이 더욱 오래 사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하면 욕심이 지나친 것일까 ?
유경희(가톨릭미술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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