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일거일동이 그분 앞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결과가 있고, 우리의 태만도 마찬가지다.
때때로 우리는 이 결과를 즉시 느끼지만 흔히
이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부상당해 길가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 사람은,
아마도 그들이 이웃사랑을 배반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지나쳐 버리고 잊어버렸다.
그러나 태만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태만, 그리고 무수한 결과들은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는 한 줄곧 계속될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고백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면,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은 의지가 없이 이루어진 것이어서 처벌받지 않는다.
선한 행동(공로)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감사를 받는다.
그런데 많은 선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 데서 이루어지므로,
인간에 의해서 결코 인식되지 않는다.
누가 그것에 보답하는가?
인간의 보상과 형벌이 모두가 아니다.
그것은 흔히 부당하게 처리된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가장 깊숙하게 숨겨진 생각과 행동을 아신다.
언젠가는 이들이 샅샅이 밝혀지고 그 응보應報를 받게 된다.
그것은 언제인가?
예수께서는, “사람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마태 16,27)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로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고린 5,10)라고 말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거짓과 겉치레로 덮여 있던 것이 그리스도의 앞에서 드러날 것이다.
즉 누가 진실로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인가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마태 20,16).
진실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에 각자에게 다가온다.
“우리 생명의 밤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나는 오늘 나의 행위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그분 앞에서 죄인으로 인식하고(고해성사에서),
나 자신을 그분의 자비로운 심판에 세움으로써
‘심판을 앞당겨 받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부당함을 알아차릴 때,
우리 양심이 우리를 단죄할 때, 믿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다.’
(1요한 3,20)라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