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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279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29 조회수386 추천수5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제 오후 2시에 서울 형사 지방법원 311호 법정에서 용산참사로 구속된 분들의 선고가 있었습니다. 방청객 입장인원은 선착순 80명으로 제한하고 있었으나 차례가 되어 간신히 입장은 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장이 선고이유를 낭독하고 있었으나 낭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양형이 선고되기도 전에 변론을 맡으신 김형태 변호사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저도 곧바로 뒤따라 나와 김 변호사님과 한동안 얘기를 나눴습니다. 김 변호사님의 말씀은 기소내용 중 다른 것은 몰라도 특수방화치사 혐의만큼은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였습니다. 어떻게 재판관의 양심으로 저런 판결문을 작성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두환 정권 때도 사법부가 이러지는 않았다며 흐느끼고 계셨습니다.

선고이유를 들으며 참으로 어이가 없는 점은 '참사현장에 투입된 경찰관의 진술 중 기소 내용과 상위한 진술 등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기소내용이 정당하다'는 납득할 수 없는 유죄 이유를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가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본 그곳 2층 민원실에 걸려있는 '破邪顯正'의 네 글자가 오늘 묵상을 이끌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에게 민중선동죄를 씌워서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라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하신 말씀으로 예수님 스스로 예언자임을 밝히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은 예언자라고 말하면 아예 몰매를 맞을 준비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으므로 복음 말씀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교리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 묵상은 자유자재로워야 하지만 교리로 알게 모르게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묵상 글을 게시하지 않을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헤로데를 여우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도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런 심리는 똑같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헤로데를 여우라고 부른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으며 "얘들아, 여우들을 잡아라, 저 작은 여우들을. 우리 포도밭을,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망치는 저것들을."(아가 2,15)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민중선동죄로 잡아드리려고 하고 있음에도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확실하게 민중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의미가 잘못 전해지고 있지만 민중들의 입을 막기는 개천을 막기보다 더 어렵다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란 고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을 막기는 이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하신 이 말씀은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대한 선입관으로 '부활'을 떠올릴 수 있지만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한다는 뜻이라면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하신 말씀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그보다는 내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뜻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의 의미는 예수님께 주어진 공생활의 남은 기간을 말씀하신 것으로 '사흘째 되는 날'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공생활을 마지막 날을 말씀하신 것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은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민중들을 보살펴 줘야 하지만 민중들 위에 군림하며 착취를 일삼으며 이를 고발한 예언자를 숱하게 죽인 그들, 겉과 속이 다른 민족의 거짓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며 한탄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예언자들도 청와대야, 청와대야! 하며 제발, 국채를 발행하면서까지 부자 감세하는 그런 짓을 하지 말고, 국채를 발행하면서까지 불요불급한 4대강 개발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모습과 예수님의 오늘 한탄은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암탉이 제 병아리를 보살피듯 용산참사의 유가족에게 온정을 베풀어 달라고 청와대야, 청와대야!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야, 청와대야! 하는 그 한탄의 소리가 어제 보궐선거의 결과의 표심일 것입니다.

파사현정과 자비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이 땅에는 정의와 진리가 살아 숨쉬며, 그날이 되어야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를 찬미 할 수 있으며, 정의와 진리와 자비가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칠 때에 우리 각자의 모습, 모습들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며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말할 날이 오기는 오는 걸까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교인 들이 오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자비를 실천하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만 이와는 먼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제 자신부터 이를 반성하며 오늘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은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이 드러날 때에만 나를 볼 수 있다 하셨습니다.
하오나 저희는 이런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도하는 잘못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사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잘못 전해지고 있는 현실을 굽어 살피시어
성령으로 저희 모두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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