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령의 날 해설+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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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수복 | 작성일2009-11-01 | 조회수50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위령의 날 (11월 2일)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기의 말씀입니다. 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7과 8ㄷ과 9ㄱ.13-14(◎ 13)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로다. ◎ ○ 들으소서, 주님, 제가 큰 소리로 부르짖나이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주님, 제가 주님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주님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 ◎
제2독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마태 25,34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요한 11,25-26 참조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욥기 19,1.23-27ㄴ) 해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은 자기 변호인과 후견인이 살아 계심을 잘 알고 있다. 살갗이 뭉그러지고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하느님을 뵙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다. 욥은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하느님께도 분명히 버림받은 듯한 상태에서 비참한 고독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같은 고독의 심연 가운데서 욥의 믿음은 놀랍도록 자란다. 비록 하느님께서 지금은 침묵을 지키지만, 어느 날엔가 반드시 당신의 정의로운 입을 여시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욥은 미래에 희망을 걸고 탄원한다. 자기는 얼마 안 있어 죽어가겠지만, 욥은 자기의 증언이 기록되어, 어느 날엔가 자기 송사가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되기를 기대한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욥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참상을 두 눈을 치뜨고 똑똑히 바라보고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 마음속에, 그들을 통하여 엄연히 살고 계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화답송(시편 27[26],1.4.7과 8ㄷ과 9ㄱ.13-14[◎ 13]) 해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이 시편은 주님을 영접하는 시편이다. 보잘것없게 보이고 천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가장 애착하시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 하찮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아울러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 힘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절절히 느껴 하느님 아버지만이 자기 구원자요 생명의 바위임을 알고 그분께 온 힘으로 매달린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합당한 자세다. 이런 겸허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복으로 채워 줄 수 있고 그들을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며 악에서 구해 줄 수 있으시다.
제2독서(로마 5,5-11) 해설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 역사상에 살다 가고, 살아 있고, 살게 될 사람은 누구든 먼저 ‘죄인’의 신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의 신세일 때이다. 그런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사랑이 쏟아진다. 2코린 5,18-20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당신 아들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당신 계획을 선포하셨다. 그 때문에 우리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의미를 띠게 되었다.
복음(마태 5,1-12ㄱ) 해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빛나는 이 대목은 교회 초기서부터 그리스도인 생활의 대헌장으로 여겼다. 이 참된 행복선언은 마태 5-7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서 ‘산상설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상설교는 매우 장엄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시나이 산 위에서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새로운 모세로 등장하신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참된 행복이 여덟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처음 세 가지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3-5절).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네가 하느님께 온전히 종속되어 있으며, 온갖 좋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고 그 주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를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 ‘가난한 삶’이 비록 고달프고 비참하고 슬플지라도, 그들은 반드시 위로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삶’, ‘슬픈 삶’ 속에서도 포악해지지 않고 관용과 온유함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은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다. 올바른 일이란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일이다. 이기적인 자기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귀중하게 보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몸소 생활로써 솔선수범하면서 선포하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과 자세를 택한 사람들이다. 자비와 관용과 용서는 사람다운 사회공동체를 이루는 데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다. 깨끗한 마음은 이기주의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결단을 내리는 마음이다. 평화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된 상태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 예수님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었으며,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불의와 모순과 갈등이 가득 찬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박해와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라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묵상 <죽음은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오늘 전례 전체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난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위령의 날을 지내는 참된 의미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여 슬픔에 잠기자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자는 데 있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 눈에만 정의로운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오늘 첫째 미사 제1독서에서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고 말한 욥의 간절한 염원은 하느님을 마주 뵙는 것이 비단 자기 개인의 성취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 일어나는 믿기지 않는 기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자녀들이 상봉하는 일이요, 인간 본성의 온갖 한계를 극복하고 인생의 마지막 위대한 변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 변화와 변형은 본질적으로 진리에 대한 전면적 이해와 주님과의 결정적인 합일로 이루어진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덮고 있는 두건을 벗겨 내실 것이며, 그 때에 올바르게 살아온 모든 사람은 사랑 속에서 그분 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죽음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권능을 행사하신다. 죽음 안에서 계약이 채워지고 당신 왕국이 완성된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중계자가 필요 없이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그 같은 개념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지상 생애와 시공 안에서 펼쳐지는 인류역사의 의미를 아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어떤 사람과 사건도 하느님 아버지의 시선과 판단을 피하거나 외면할 도리가 없다. 개인 생애와 역사는 순간순간 하느님의 판단을 받아 그 가치가 정해지고 죽음과 마지막 날로 이어진다.
<마지막 심판은 지상의 인간사와 인류사 안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공허한 말에 그쳐서는 안 되고 나날의 생활과 역사현실 안에서 그 의미를 실현해 가야 한다. 최후심판은 우리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고, 가련한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무서운 선고 같은 것이 아니다. 최후심판은 우리 인생사와 인류사 한가운데서 이미 내려지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는 판정은 시시각각 내려지고 있다. 그 판단이 쌓여서 어느 날엔가 모든 사람 앞에 명백히 공개될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고 빼앗기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늘도 세상을 살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말 그대로 몸과 마음으로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복을 받고 있으며, 죽는 순간에 그 복의 정도가 결정되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과 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적으로 삼고 있는 셈이며, 그들은 이미 저주를 받고 있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에 저주의 정도가 결정되며,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완성, 즉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로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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