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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이라는 바다에 소금인형처럼> - 정중규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2 조회수456 추천수1 반대(0) 신고
 
[정중규 칼럼]- 세상이라는 바다에 소금인형처럼 녹아들어야
 
2009년 10월 29일 (목) 14:32:32 정중규 mugeoul@hanmail.net
 

   
▲부활하신 예수(사진/한상봉)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1요한 2,26).

‘누가 그들을 속인다는 것일까.’ 사도들의 편지에 자주 나타나는 다분히 피해망상적인 이런 표현은 그 시대가 얼마나 풍전등화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던가를 반증해준다.

하기야 유대 땅을 벗어나 로마제국 전 지역으로 교회가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마주친 박해의 손길에 늘 쫓겼던 그들의 처지에서는 모든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아이가 세상을 까닭 없이 두려워하듯 세상이란 도대체 믿을 게 없었던 것이다. 신앙과 세상 사이의 이분법적 분별의식과 영육 이원론적 세계관의 뿌리가 여기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미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집단으로 바뀐 우리 그리스도교회가 아직도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을 기본정서로 삼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이 들어 어른 몸집인 사람이 어린아이 생각과 행동을 못 버리는 유치한 모습과 같다고 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취임사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권능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과 전 인류를 돕는 그리스도의 권능에 봉사하는 사람들과 교황을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 정치·경제적 체제 간의 경계 그리고 문화·문명·발전의 모든 영역을 주님의 구원의 손길 앞에 활짝 열어 놓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아십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 때가 1978년,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는데, 지금 읽어도 감동스러운 연설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라고 주문하기에 앞서 교회는 자신의 문부터 먼저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야 하고, 무엇보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교회가 세상과 인류를 향해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짓까지 막는 됫박 역할은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교회는 게토가 아니다. 더욱이 선교는 울타리를 치고서 양들을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며 누룩이다.’라는 말씀대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세상을 위해 바치는 희생행위여야 한다. 세상 속에다 옥상옥이나 소도(蘇塗)를 만들려는 교회의 도피적 행태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과연 이 세상 안에서 그렇게 세상과 따로 살겠다고 하면 그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된 인류의 구원은 어찌되는 것인가!

과연 하느님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에 와 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인을 위로하시는 예수(사진/한상봉)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공생활을 하셨던 그 시대 역시 그런 시기였다. ‘분리’라는 ‘바리사이’ 의미 그대로 종교가 분별의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단죄하고 죄악의 소굴로 몰아붙이며 그저 세상과 유리된 채 사막 위의 신기루처럼 공중부양해 있던 시대, 지도층은 현세적 허무주의로 민중들은 내세적 허무주의로 도탄에 빠져있는 절망의 그 시대. 과연 그 허무의 바다에서 누가 그들을 구출시킬 것인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어떻게 회복시켜줄 것인가.

여기에 그분께서 희망의 시동을 거신다. 현세와 내세를 하나로 아우르는 통전적 영성으로 하느님나라의 꿈을 지피신다. “두려워 말라. 용기를 내어라. 하느님이 너를 부르신다. 기운을 차려라. 일어나라.”고 재촉하시면서, 복된 소식(복음)을 곳곳에 선포하신다. 하느님이 바로 구원자이시다. 하느님의 권능, 그 사랑의 힘이, 그 하느님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 죄의 굴레를 벗어던져라. 모두 그 나라 안으로 들어오라. 아니 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 하느님나라의 그 힘이 이 세상과 우리 삶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져 가동된다면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에 와 있다(루카 17,21).

그렇게 교회는 마치 자기 집 안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처럼 세상 안에서 하느님 구원사업의 협조자로 그분의 뜻을 용감히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편견과 단견의 폐쇄적 오만과 무지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열린 자세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그분 안에서 두려움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먼저 다가서야 할 것이다.

참으로 교회여, 무얼 그리 두려워하는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 그분을 모시고 있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는가!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인류를 이끄시는 조화주이시다.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과 인류를 완성시키시는 구원주이시다. 세상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세상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세상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종말적 완성인 구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그분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그리 두려운 것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열린 문을 다시 닫아 거는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시대의 예언자이자 착한 목자 교황 요한 23세를 중심으로 교회가 겸손하게 스스로 가슴을 찢어서 돌로 된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어주시라고(에제 11,19) 하느님께 내어드렸던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노력 그 시발점이었다. 철옹성 같이 닫혀있던 교회의 문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령에 의해 열렸던 순간, 제2의 성령강림 시기였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열리기 시작한 성령의 문을 다시 닫으려 해선 안 된다. 그런데 갈수록 교회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유산을 과거의 유물로 여기며 창고에 가두려는 앙시앵레짐의 반동적 움직임이 거세져만 가고, 그 움직임은 현 교황 베네딕트 16세와 더불어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로마가 보수화되니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한국 천주교회도 더욱 보수화되어 간다. 문제는 이런 보수화가 교회의 정체현상을 심화시키는 주 요인이라는데 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이라고 표방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성을 외면하고 성직자 중심의 견고한 성곽구축에만 박차를 가하는 역사적 후퇴 그 역행은 교회에 비극적 결과만 안겨다 줄 것이다.

평신도의 힘으로 세워졌던 한국 천주교회. 실학과 서학이 깊이 관련되어 있듯이, 한국천주교회는 사회개혁의 차원에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복음적 진리를 깨쳐 믿음으로 나아간 공동체다.  그 시대에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혁명가도 같이 시대적 이단아로 가는 길이였으며, 또 그러했기에 순교를 각오해야 했고 결국 그 시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박해받고 제거당해야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장엄하게 선포했던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앞당겨 살아온 게 한국교회였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선교사들의 영신주의적 신앙관에 입각한 내세주의에 의해 신자들은 순한 어린양떼로 급속하게 순치되어갔다. 어쩌면 민중들에겐 암담하기만 했던 조선 말기의 그 시대, 살 길이 막막했던 그들에겐 차라리 죽어 천당 가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고 여겨졌던 서글픈 순교시대였다. 수만 명의 순교자를 만들어 낸 그 시대가 우리 민족에게 준 열매란, 선교지역으로 지정되기 이전의 초기창립 선조들을 모두 외면하고 오직 선교사 중심으로 선정된 ‘103명 성인군단’밖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을 지경이다.

선교사들에 의해 뿌리내린 신앙과 세상의 이분법적 분별의식과 내세지향적 영육 이원론적 세계관은 박해가 끝난 뒤에도 10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그런 추세는 1970~80년대에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곤 요지부동의 대세가 되었고 지금도 확고부동하다. 교회가 그렇게 요지부동하고 확고부동한 만큼 교회는 침체 침하 침몰되고 있다.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시는 어머니 마리아(사진/한상봉)

평신도 영성 다시 회복해야

이제 200년 전에 꿈꾸었던 평신도들의 영적 활력을 되찾아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한국 천주교회가 처해 있는 외화내빈의 총체적 위기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다. 지난 해 새천년복음화사도회 복음화학교 심포지엄에서 ‘미래 한국사회 예측과 한국교회의 역할’이란 제하의 발표문에서 심상태 몬시뇰(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은 한국 천주교회에 이런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치는 ‘삼위일체 친교 교회’ 실현, ▲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 사이의 가교 역할, ▲ 인터넷 공론의 광장 ‘아레오파고스’ 및 정보매체의 활용, ▲ ‘사랑의 문화’ 실현을 위한 노력, ▲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대의 세계화’ 실현 노력, ▲ 생태계 위기 극복을 위한 선도적 노력, ▲ 한국·아시아적 교회 창출 노력, ▲ 교회 구성원의 자기정체성 보전 및 사회와 인류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투신

2천 년 전 유대 땅의 종교들만큼이나 이 시대 일반 서민들에겐 우리 교회가 공중부양의 신기루만 같게 여겨진다. 교회가 제시하는 꿈이 그러하고, 외치는 말이 그러하고, 움직이는 몸짓이 그러하다. 피라미드는 무너지지 않았고, 삼중관이 다시 번쩍이고, 권위의 붉은 옷을 걸친 옥상옥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현실도피의 아편 같은 몽환적 기도문들이 넘쳐나고, 게토의 무덤 속 평화가 찬양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은 갇히고, 광야의 외침은 공허하게 떠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떠나고 다시 예언자의 피맺힌 십자가들이 언덕 위에 하나 둘 세워지는데, 제대 위엔 도금된 십자가만 유난히 반짝인다. 그럴 때 신자 수 ‘오백만’이란 그저 통계적 허수일 따름이다!

평신도들이 깨어나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제직·예언직·왕직이 내실 있게 교회와 세상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셨던 그들이 그분 안에서처럼 교회 안에서도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평신도 중심의 하느님 백성의 교회는 신천지가 아니라 초대 교회로 복귀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세상 구원을 위해 봉헌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닌가! 여기서 그리스도와 교회와 평신도는 동일한 의미가 된다.

19세기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글 ‘소금인형’에 나오는 소금인형처럼 교회와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향해 자신의 몸을 온전히 던져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와 교회, 세상 안에서 일어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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