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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9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28 조회수649 추천수6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 신앙과 결단

교리 9: 제 1 절 하느님의 계시 II

 

왜 그렇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직접 우리 개인에게 하시지 않고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셔서 하시고 지금은 더 이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이건 어쩌면 불공평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모든 역사 안에서 함께하시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의 12아들들, 모세, 판관들, 왕들,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급기야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또 이스라엘 작은 마을 나자렛에서 한 여자에게서 잉태되고 그렇게 33년이라는 아주 짧은 시대에만 사셨고 어렸을 때 이집트로 도망갔다 온 것을 제외하고는 좁은 팔레스타인을 떠나셨던 적이 없으시고 72명의 제자들이 있으셨지만 특별히 그 중에서 12명만을 사도로 뽑으셨고 어떤 중요한 때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다니셨으며 부활하셔서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만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보편적이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개인들에게만 특별한 은총을 주시고 더 이상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이유는, 즉 당신을 계시하시는 목적은, ‘관계’를 맺기 위한, 즉 사랑을 위한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더 잘 알고 그래서 나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치 않는다면 굳이 내 자신을 드러내 보일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내 자신을 모두에게 똑같이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만큼 내 자신을 털어놓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나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 자신을 털어놓는 것은 낭비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민족만을 선택해서 예전부터 조금씩 교육하여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이야기를 해도 적어도 몇몇은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을 주시지 않는 분입니다. 하느님에겐 쓸데없는 낭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교리를 하는데 단 한 명도 듣지를 않는다면 굳이 허공에 대고 교리를 하며 시간과 힘을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교리를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들만 있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솔직히 다 털어놓으시려 한다면 그것을 듣고 이해해 줄 누군가가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인데,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성모 마리아시고, 그래서 그 분이 온전한 하느님의 아들을 받으셔서 이 세상에 전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실 구체적으로는 성모님을 보고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이 아니셨다면 당신이 세상에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제한 적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온전히 하느님 자신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받지도 않는 선물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그 분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질 한 인간도 동시에 마련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하느님의 아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 완전한 분이셨습니다.

 

결국 관계란 한 사람과 단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니라, 한 사람과 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고 한 사람과 관계를 구체적으로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한 사람만으로 세상에 계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일일이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만 알려주시고 지금은 보이지 않게 우리 각자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다고 해서 불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말씀을 듣기를 거부했고 빛을 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벌을 받게 되었었고 언젠가는 그 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지만 지금까지 아직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도 한 사람 한 사람씩 사랑의 관계를 원하시고 그래서 교회가 그 분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이고 이것을 배우는 분들의 목적은 그 분을 더 잘 알아 그 분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듯이, 이 작은 사랑은 바로 우리 옆의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모님과 당시에 만날 수 있었던 몇 명과만 깊은 관계를 맺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맺으신 최대한의 관계가 성경에 나오는 그런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 각자와 또한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체적이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한 사람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또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에 이 계명만 남겨놓고 가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이 어떤 사랑을 하셨는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을 통해서 당시의 예수님을 지금의 모습으로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교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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