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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회개의 세례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06 조회수948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대림 제 2 주일 - 회개의 세례

 

 

 

얼마 전에 축구를 했습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한 신부님의 인대가 끊어졌습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 바쁜 와중에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고 또 한 달간 깁스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더 안 좋은 소식은 앞으로 격한 운동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이라 참 안 되었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학생 때 똑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신학교 초기에 제가 체육부장을 했는데 다른 날과 변함없이 거의 바로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겨울이었고 한 신학생이 혼자 공을 잡고 돌다가 진흙에 박힌 발을 빼지 못하여 인대가 끊어졌습니다. 그 신학생은 그 이유로 휴학을 하게 되었고 결국 복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체육부장으로서 겨울에 준비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축구를 시작한 것에 대해 지금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오랜 기다림 속에 메시아가 오던 때에는 어땠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할 선지자가 미리 와서 주님의 길을 닦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오기 전에 항상 세례자 요한의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준비되지 않는다면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오시는 손님이 귀할수록 그 준비도 철저하게 이루어집니다.

군대에 있을 때 갑자기 하루 종일 청소한 일이 있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높으신 분이 헬기로 우리 부대에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스팔트를 광내듯이 청소하고 났더니 갑자기 빨리 짱박히라는 것입니다. 짱박히라는 말은 숨어서 나오지 말라는 군사 비밀 용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헬기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헬기는 우리부대에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군대에서는 한 사람이 헬기로 한 번 지나치는데도 그렇게 생난리를 치는데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이 오시는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집축복을 가거나 신자 집을 방문할 때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다 집들을 그렇게 깨끗이 해 놓고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열지 말라는 문을 열어보았을 때 그 비밀을 알아내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은 하루 종일 청소하고 시간이 없을 때는 널려 있던 것들을 몽땅 쓸어서 작은 방이나 농, 화장실 등에 몰아넣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루 종일 청소했는데도 아직도 지저분하다고 집축복을 안 받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아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창피해서라도 스스로 손님을 받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이전 구약 전체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던 시간이었고 마지막 집중코스로 준비시켰던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데 부족함이 없는지 확인하고 준비시키는 사명을 받고 사셨던 분입니다. 예수님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귀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주처럼 귀하고 거룩한 것’이 예수님이 아니면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제 경험에도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특별히 신경 써서 많이 해 준 이들이 나중에 가서는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양 서운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내용으로 알아봅시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유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당신이 세상의 모든 죄들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 죄의 멍에를 가볍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누구나 다 죄를 짓지 않고 살리라고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죄의 삶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결단’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세례를 준 것은 사람들에게 죄의 삶을 벗어나 회개의 삶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하라는 의미에서였습니다. 이 ‘결단’은 마치 강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이고 분명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두 지역의 경계가 되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결단은 강을 건너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중요한 표징은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말을 믿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커다란 바다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지팡이에 의해 두 쪽으로 갈라진 바닷물 사이를 지나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 쫓아오던 이집트 병사들은 그 바다를 건널 수 없었고 그 곳에서 다 죽었습니다. 물은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지닙니다. 밑으로 들어가면 죽은 것이고 위로 올라오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다 그렇게 태어납니다. 이집트는 죄의 상징입니다. 종살이를 했다는 것은 죄의 종살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모세의 지팡이가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지팡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죄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을 ‘세례’라 부릅니다. 그 결단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바닷물에 빠져죽은 병사들은 마귀들을 나타내고 마귀들도 인간들의 결단과 의지 앞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준비하도록 했던 것이 바로 이 ‘의지적 결단’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도 하고 ‘세례’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본래 의미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죄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해도 죄의 삶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또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집트에서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막에서도 똑같은 죄들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의지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같은 죄가 아닙니다.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가나안 땅으로 다시 일어나 나아갔고 이집트에 남아있는 이들은 그런 결단이 없었기 때문에 죄의 삶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선의지’를 가진 사람은 죄에 다시 떨어질지라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일어섭니다. 그러나 선의지를 갖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의지가 없거나 혹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냥 살던 대로 육체의 쾌락과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살겠다고 주저앉고 맙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베드로와 유다입니다. 이들은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유다보다는 베드로의 잘못들이 많이 쓰여 있습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실수하는 인물이었고 한 때는 예수님께로부터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다는 한 번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베드로는 그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유다가 무릎 꿇고 용서를 청했다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물론이고 다른 사도들도 용서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들 도망가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그런 선의지가 없었습니다. 유다가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은 회개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용서를 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죄의 상태로 주저앉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끊임없이 회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선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넘어질지라도 목적지를 항상 보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하지만 매일 새롭게 일어서며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베드로를 사도들의 첫 번째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선의지를 가지고 매일 새로워지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맡기시고 그의 마음 안에 태어나셔서 함께 사십니다.

 

지금도 세례자 요한은 우리 마음 안에 외치고 있습니다. 매일 회개하며 죄의 삶에서 멀어지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죄짓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인 양 포기하고 그 삶에 주저앉을 것인지 그 판단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번 상기합시다. 예수님은 거룩한 당신을 개에게 주시지 않을 것이고 은총의 선물을 돼지에게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곧 다가올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도록 합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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