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펌 - (93) 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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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순의 | 작성일2009-12-06 | 조회수1,61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6798 작성일 2004-04-06 오후 2:28:15
(93) 아기 이순의
지금은 아기랑 같이 창을 열었다. 7개월 된 아기다.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를 겨우 면할 만큼의 작은 체중으로 태어나서 지금도 아주 작은 아 기다. 젓 비린 냄새가 숭글숭글 피어오르고 꼼지락 거리는 손과 발이 만지기도 안쓰럽게 작아서 부서질 것처럼 아깝다. 뭔가 불편하다고 칭얼거리고,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민둥한 잇몸을 허옇게 벌리고 웃는 다. 컴퓨터 자판에서 손가락 하나가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도 잠깐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실증이다. 그거 하지 말고 자기만 봐 달라고 칭얼 칭얼거린다. ㅡ잠깐ㅡ 워낙에 순둥이라서 잠깐 사이에 잠이 들었다.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웠어도 내가 늘 불 러주는 십팔번 동요로 안심을 하는지 몇 번 되풀이 하지 않았는데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면 잠이 든 대로 그 생명력이 기쁨이 되어 전달된다. 걱정을 했던 옆방 새댁의 방이 나가게 되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집을 구하러 나가야 한 단다. 봄바람이 차고 황사에다가 큰아이까지 동행하려면 힘들 거 같아서 아기를 보아주 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녀석들이 이사를 가고 나면 가슴이 허전 할 것 같아서 마 음이 더 스산하다. 큰 아이는 큰 아이대로 제 엄마를 따라서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고 언니라고 부른 다. 내가 새댁 집에 들르면 엄마로 부터 나를 갈취(?)하기 위해 어린 꼬맹이의 관심 끌기 작전은 대단하다. "어니 그리 그이자. 어니 기 찾기 하자. 어니 브러 하자......." 그림도 그리고, 길 찾기도 하고, 불럭 놀이도 하고, 심심치 않았던 조무래기 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 전에 아기를 돌보는 일을 했었는데 지금도 나는 그 녀석을 등에 업고 까꿍 까꿍 하는 꿈을 꾼다. 뿐만 아니라 그 녀석을 안고 놀이공원에서 뛰는 꿈도 꾸고 별별 영 화필름을 돌리다가 잠을 깬다. 그 녀석을 잊는 게 몹시 힘이 들었다. 기침이 심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녀석이 보고 싶 어서 다시 보러 갔을 것이다. 얼마 전에 그 녀석의 생일이 지났다. 생일에 가서 꿈에 보 이는 녀석을 보려고 했다. 선물로, 좋아하는 스티커도 사고 그림책도 만들어서 가려고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손이 다처서 그렇게 꿈에 보이는 녀석을 보러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녀석이 할머니와 엄마랑 같이 방문을 해 주 었다. 아이답지 않게 속으로 삭히는 성격이라서 그 내면의 세계를 꺼내주려고 몹시 힘들게 공 을 들여가며 키운 녀석이다. 어린 녀석이, 좋아도 좋은 표정을 하지 않고, 싫어도 싫은 표정을 하지 않는 녀석이라서 그걸 표출시키도록 해 주려고 무척 노력을 기울여야했었 다. 아이들은 그저 빵실빵실 웃고, 고집스럽게 울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는 녀석 이라 걱정이 많았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녀석이 왔었다. 그녀석이 쓰던 변기통도 치우지 못 하고 그대로 그 자 리에 있고, 장난감도 치우지 못 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찍어놓은 사진들도 그 자리 에 붙어 있고......... 그런 녀석의 생일날에 가려다가 손이 다처서 못 갔는데 찾아 온 것 이다. 내가 기침 때문에 힘들어 할 때 그 녀석은 나를 기다리느라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 녀 석의 속마음은 어른이 꺼내 주어야 하는 녀석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신이 주 신 생명에 대한 최선의 노력으로 그 녀석을 키웠었다. 새댁의 큰 아이를 보아도 그렇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가 마음에 들면 쉴 틈 없이 그 상대를 부르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 녀석은 2년을 함께 살았어도 하루에 다섯 번도 나 를 부르지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아서 녀석의 마음을 읽어 주어야 하고, 그 마음을 읽어 주지 않으면 표현하지 않고 상처를 받는 녀석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맑게 웃어야한다. 그러므로 그녀석도 맑게 웃어야 하고 웃도록 해 주고 싶었다. 정말로 그 녀석을 사랑했으므로 그 나이에 표출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꺼 내 주려고 진짜 많이 노력 했었다. 그 녀석의 존재가 주는 생명력이 나를 한 없이 행복하 게 했고 그 사랑이 나에게 희망이었던 것이다. 곧 멎을 줄 알았던 기침이 너무 오래 가는 바람에 그 녀석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 다. 혹시 기침을 옮길까봐 걱정이 되었고, 지속되는 기침의 원인을 알기 전에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들었었다. 전화를 들면 다른 집에 하는 전화가 그 녀석의 집으로 단추가 눌러지곤 했으니 나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모른다. 그런 녀석이 며칠 전에 다녀갔다. 그 날도 그 녀석 꿈을 꾸었는데 보러 온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녀석을 위해 다행인 점도 훨씬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짐작이지 만 너무나 그 녀석을 사랑해 버린 나로 인해 엄마의 역할이 한 발 비켜서 있었는데 그걸 돌려주었다는 점이다. 적어도 다른 아기도우미가 그 녀석을 돌볼 때는 완전히 나를 믿 어서 나에게 맡겨버린 것처럼 비켜있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작고 조금일지라도 엄마의 역할이, 클 것 같거나 많을 것 같은 나의 역할 보다 훨씬 효과 적이고 중요하며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어미 노릇에 선배인 나의 걱정은 젊은 엄마의 서툰 어미 노릇이 속으로는 무척 염려스러웠다. 타고난 성향이 내성적인 아이에 대하여 도우미엄마 인 나 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조바심을 또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나와 그 녀석의 사이를 갈라 놓으셨다. 나는 일상의 모든 것이 사람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라고 여기므로 기침 또한 내가 오랫동안 앓고 싶어서 앓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이 그 사랑스러운 녀석에 게 엄마의 자리를 확실하게 회복시켜준 은혜라고 믿는다. 옆집 새댁의 둘째 아기는 아직도 새근새근 자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 아기는 누구에게나 존중받고 귀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내가 새댁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는 큰 욕심 없이 서툰 엄마의 역할을 무엇보 다 중요하게 우선시하며 살 줄 안다는 점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모든 기 술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서로서로 스승이 되어 살아간다. 처녀가 결혼을 해서 아기 낳고 엄마가 되어 보면, 그 아기를 통하여 엄마로 사는 법을 배운다. 큰아이 때 하던 실수를 둘째아이 때는 하지 않게 되고, 큰 아이가 아들이라서 몰랐던 점들을 작은 아이는 딸이 라서 새롭게 알아가는 모습들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아기는 어미 의 정성으로 자라지만 어미를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가 아기를 기르는 것 마저 분업화 되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나는 극구 반대하 고 싶지만 현실 또한 인정 할 수밖에 없다. 생활수준의 향상과 지식의 평균화는 점점 육 아의 기본이 분산되는 현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의 책임론인 자녀는 어 머니의 보육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육도 당연시 되면서 희생의 몫이 모성본능의 전통 에서 부성본능을 필요로 하는 육아보육의 자리가 이동되는 가운데 때로는 치명적인 공 백이 드러나는 것도 심각한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지는 이 순간에도 주님은 당신의 원칙에 충실 할 것이며 그 응답은 인간의 몫이다. 우리는 오늘도 신이 주신 생명인 나 자신과 주변의 모 든 생명들에게 그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부여하신 신께 대한 신앙의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꿈에서라도 그렇게 보고 싶었던 우리 딸과 새댁의 아기들에게 은총이 충만하 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아기들도 사랑 받기를 기도한다. 세상의 모든 남성 과 여성이 자기 자신이 매우 중요한 생명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후후후 아직도 새댁의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2009년12월 매일미사 책표지에서 발췌,
<구원을 향하여(한반도의 성 가정) 2007년, 심순화카타리나 작, 주 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관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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