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 신앙과 결단
제 2 장 하느님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
성경의 해석 5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우리가 보통으로 사용하는 ‘안다’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꿀에 대해 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은 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맛이 달고, 벌이 만들고, 성분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그 종류가 몇 가지에 이르고 등등. 꿀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꿀을 먹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꿀이란 것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일지라도 그 꿀을 직접 맛보았다면 오히려 학문적으로 많이 아는 그 사람보다 꿀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아이는 말로써는 그 맛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 것이지만, ‘정확히 아는 것’이 ‘많이 표현되어져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체험한 사람일수록 그 사실을 표현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장미꽃 향기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장님에게 빛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꿀맛을 전혀 못 본 사람에게 꿀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나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비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비유로만 설명하신 것입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 겨자씨의 비유 등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하느님나라에서 오셨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도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체험되지 않는 지식은 교만만 쌓을 뿐입니다.
당대의 저명한 교사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바오로도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말씀과 그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열의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그의 눈에서는 비늘이 떨어져나가고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사울이 디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다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사도 9,17-19)
지금까지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없게 했던 이 비늘을 떨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서 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이전에 먼저 믿어야합니다. 믿는 사람은 성경을 맘대로 해석해도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나 우리 개인에게나 믿음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이후에 성경을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예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2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1-4)
그가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이 출애굽 과정에서 겪었던 것들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내용을 모두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구름은 아버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고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도 구름에서 말씀하셨으며 성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도 계약의 궤 위에 구름이 자욱하게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 때나 타볼산에서의 변모 때에도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심으로써 영적이신 아버지는 구름으로 상징된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대를 돌며 향을 치는 것도, 제대는 계약의 궤를 나타내고 향의 연기는 구름을 일으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의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재생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세례를 상징하는데 바다 속에 들어가 옛 자신을 죽이고 모세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모세도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 그분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례란 바로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의미합니다.
영적 양식은 당연히 만나를 상징하고 영적 음료란 바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을 상징합니다. 영적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영적 음료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체이고 말씀이며, 그 피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바위가 깨어져 물이 나왔듯이 그리스도의 몸도 깨어져 피와 물이 나온 것입니다. 물은 성령님을 상징하지만 피로써 죄가 씻어지면 당연히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물과 피와 성령님은 서로 일치(1요한 5,8)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상징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