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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100) 행복이 무엇인지?!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21 조회수396 추천수1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6904         작성일    2004-04-22 오후 3:21:40 
 
 
 

2004년4월22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ㅡ사도행전5,27-33;요한3,31-36ㅡ

 

  (100) 행복이 무엇인지?!

                                    이순의

 ㅡ관심ㅡ

작년 성 목요일 밤의 만찬미사에 참례하였더니 대성당 안의 모든 좌석들이 하얀 번호

표를 달고 있었다. 청력에 장애가 있는 나는 스피커의 방향이 익숙하기 위해서 항상

앉는 자리만 앉는 습관이 있는데 역시 그 자리에도 번호표가 떡 붙어 있었다. 앉기는

앉았다. 앉아서 번호표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자신이 없었다. 번호를 불러주실 신부님

의 완고하실 청을 거절하기에는 군중이 모두 신부님의 편이라서 시선집중이 될 것 같

았고, 받아들이자니 조신한 여인의 발을 씻어달라고 내밀 자신은 더욱 없었다. 더구

나 40대 중반에 이르도록 외간남자 앞에 발을 놓는다는 것은 상상을 안 해 봤는데 외

간남자도 못 되는 신부님께서 씻어주시는 발은 감히 감당하기 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절을 하기에는 그 날 주님의 복음이 사형선고 보다 더 지독 하였고, 신부

님은 분명히 주님 말씀의 대리자답게 인용하실 거라는 것은 빤한 짐작이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요한13,8)"

 

나는 슬그머니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2층에는 번호표가 붙어있지 않았다. 들어야

할 귀가 좀 불편하다고는 하겠지만 자리에 만족이 되었다.

그런데 미사가 시작 되고 세족례를 집전하시던 신부님께서는 번호를 호명하지 않으셨

다. 가뜩이나 자기의 번호가 불려 질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했을 신자들

의 긴장감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 하셨다.

"오늘 밤에 ’신부님이 내 발을 꼭 씻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신자들은 모두 나오

세요. 제가 보좌 신부님과 함께 정성껏 만져서 씻어 드릴게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신자들이 넘쳐 났다. 열두 명씩 스물네 명을 넘어 훨씬 더 많

아진 신자들을 전례봉사자들이 통제를 할 만큼 다양한 교우들이 제대 앞에 꼭꼭 끼어

서 앉았다. 그 날 밤에 베드로처럼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김을 받아서 신부

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형제자매들이 많아서 번호표를 붙인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였다. 너무나 좋은 밤이었다. 물론 두 분 신부님께서는 힘이 드셨지만 얼마나 복된

밤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해는 신자들이 나오지 않아서 곤욕을 치를 때도 있었는데 발

을 씻어달라고 넘쳐나는 신자들을 보면서 두 분 사제의 복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했다.

 

올해의 성 목요일 밤에는 만찬미사에 가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이미자 45주

년 기념 공연>을 짝꿍과 함께 관람하고 있었다.

주님의 성전을 벗어나 전혀 다른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미자라는 한 가수를 보

면서 신께서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갖고 계시는 관심에 대한 위대한 탄복은

거저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나 비싼 티켓요금 때문에 우리는 2층에 자리 잡았다.

1층과는 달리 2층은 연로하신 어른들께서 자리를 많이 하고 계셨다. 이미자라는 한 사

람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수 자기의지로 모여든 군중이었다. 빈 좌석이 단 한

자리도 없을 만큼 꽉 찬 열기는 이미자씨께서 얼마나 좋은 몫을 가졌고 그 몫에 충분

한 소명을 다했는지 짐작이 되었다.

 

너무나 깔끔한 공연이었다. 군더더기 한 점 없고, 군소리도 늘어놓지 않고, 오직 <이

미자 노래>가 좋아서 오신 분들께 <이미자 노래>를 듣게 해 주는 성실도로 모든 답

례를 다 하는 모습은 존경스럽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다. 코러스도 단 한 명을 부르

지 않고 오로지 이미자 한 사람의 최선으로 2시간의 모든 공연이 완성되는 환상의 밤

이었다. 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찬조 출연자조차도 겸손했다. 조영남씨 딱 한 분이

오셔서 의상을 갈아입도록 자리를 대신해 주었는데 그 또한 <이미자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미자 노래>가 좋은 사람들에게 후배 가수는

열창으로 한 곡을 선물하고 조심스럽게 커튼 뒤를 살피더니 두 번째 곡을 부르면서도

계속해서 커튼 뒤를 살피다가 의상을 갈아입고 커튼 뒤에 대기 중인 선배 가수를 발견

했는지 금시 부르던 노래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바로 누님 같은 선배님을 무대로

모시고 이내 물러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나 같았으면 기왕에 초대된 거 내 노래를 끝까지 부르려 했을 것이고, 또한 저렇게 자

기의 노래를 중단해 줄 만큼의 배려가 넘치는 후배를 만난다면 내 스스로가 자신을 과

대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선배도 후배도 모두 겸손했다. 그 겸손의 가치가

청중에게 말없는 모범을 호소하고 있었다. 공인으로 살아 온 이미자씨에 대한 소문은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노래처럼 대중적이다. 이혼과 재혼, 딸에 대한 수 없이 많은 비

정한 기사들의 반면에 재혼한 가정에서는 고결하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주 조심스

럽고 엄격한 결혼생활을 꾸려 간다는 현모양처의 극적인 기사들, 그리고 교수님 노릇

을 아주 철저하게 하신다는 학자적인 기질까지 대단한 공인의 자리는 사생활도 공인이

어야 하는 이중성의 부담감을 떠안고 이미자씨는 반세기를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겸손은 대중으로 부터 모든 것을 이해받고 모든 것을 이해하며 또한 너그러운

풍요를 보장하는 여유가 있었다.

 

노래 하나로 45년 동안 사랑받은 <이미자 45주년 기념 공연>은 삶의 과정 모두를 보

상받고 있었으며 자신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달관하고 있었다. 가끔은 64세의 고령에서

느끼는 기약 할 수 없는 다음을 생각 하시는지 감정을 절제하느라고 몹시 상기되기도

했다. 생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마음의 공연은 아름다운 황혼을 불사르는 노을빛보다

더 강열하게 타고 있었다. 그런 이미자는 세상에서의 모든 사사로움 들이 지나가는 거

품일 뿐 남아있는 것은 노래와 이름이었다. 사회를 맡아 주신 김동건 아나운서께서는

"격동기의 한국사회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해방과 전쟁이 끝나고 근대화의 물결 속

에서 허리를 묶고 서럽지 않은 사람이 단 한분도 안 계실 만큼 고생스러운 시기였습니

다. 그런 때에 이 나라에 이미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마음을 추스르며 서글픔을 달래고

살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이미자라는 가수는 우리 국민과 함께 살아

온 우리 국민들의 가수입니다." 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이미자의 노래는 그 가사가 주는 서정시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열렬한 연정의 청춘에게는 감미로운 살결 같은 촉촉함이 있고, 서러운 어머니의 희생

에는 한 많은 탄식의 절규를 대신하는 메아리가 있고, 따뜻한 아저씨의 한 잔 술에는

거저 쏟아지는 만족한 가락이 있고,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애매한 마음에

는 간드러진 교태로 일렁이는 달램이 있고, 이별하는 사람에게는 찢어져서 멈춰버릴

것 같은 심장의 아픔이 있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할머니

는 할머니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준 노

래가 아니던가?!

이런 노래들이 이미자의 목소리에 운율을 타고 세상의 곳곳을 스며드느라고 45년이며,

죽고 살고 태어나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후비느라고 또 45년이 갔으니, 사

람의 수는 셀 수조차 없고 세월의 사연은 기록조차 어렵다. 종로의 고급 요정에서도,

산골짝 깊은 선술집에서도, 어느 기업의 신바람 난 야유회에서도, 독수공방 긴긴 밤

에 시골집 머슴의 고단함에도, 누군가의 가슴을 적셨을 그렇게 수많은 사연이 되어

45년 동안이나 듣고 불러졌을 이미자의 노래는 이미자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는 행복

이었다.

 

"저희 부모님들은 노래를 잘 하시지 못 했어요. 전에는 부모님께서 주신 소리라고 생

각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하늘이 주신 너무나 크신 선물을 잘 누리고 살았

다는 생각을 합니다. 45년을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을 때는 하늘의 선물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길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또 앞으로 남아있을 모든 삶의 과정에서도

저는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제가 감히 50년을 기약 할 수는 없

고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서 하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노래를 부르며 여러분 곁에서

살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라는 말 이상의 말을 몰라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제 마음은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보다 더 감사합니다. 저의 노래를 사랑해 주시고 관

심을 아끼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 치의 아쉬움도 없었을 만큼 이미자의 노래는 우리 부부에게 성 목요일 밤의 축제

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체구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대극장의 4000여명의 청

중을 두 시간 동안이나 꼼짝 하지 않고 앉아있게 해 주시는 저력은 앉아있는 사람도

신의 능력이라고 밖에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공연이 끝나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5년 후에 이미자씨가 다시 50주년 기념 공연을 할 수 있다면 꼭 다시 오자고.

그때도 지금처럼 가난하면 빚을 내서라도 다시 오자고 손가락을 걸고 지장을 찍고 맹

세까지 했다. 이미자씨는 45년 동안 노래를 하고 후진양성에 책임을 지고 있는 원로로

서의 소신도 확실히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분을 마지막까지 제1인자이게 하는지

도 모른다.

 

"저는 트롯트란 말을 몹시 싫어합니다. 이렇게 좋은 우리 한국민의 정서를 노래하는

가요에 트롯트라는 외래어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우리국민에 의해

서 불러져 온 우리의 노래를 트롯트가 아닌 <전통가요>라고 불러주시면 좋을 것입니

다. 저는 그동안 <전통가요>를 불러주신 수많은 선배님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들

이 남기신 많은 가요사적인 업적들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중가요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요즈음은 제가 부르는 <전통가요>가

젊은이들에게 소외 되면서 미래가 불투명 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요를 불러온

사람으로서 걱정이 됩니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의 <전통가요>는 그 명맥이 이어져야

하고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우리 <전통가요>의 정통한 마지막 세

대라는 위기감을 느낄 때 그 책임감이 무겁습니다.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 라

도 그 명맥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전통가요>보전을 유지하는 데는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이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3월 어느 날에 짝꿍의 생일이었다. 지방에 가서 오지 않는 짝꿍을 불러 들였다.

"생일 밥은 집에서 먹어야지 생일 밥도 밖에서 먹으면 당신 생일날에 당신 가정이 파

탄 나는 날인줄 알어."

생일 전날에 가정을 파탄 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밤중에 커트라인에 달랑달랑 걸쳐서

들어왔다. 하루 종일 한 손으로 시루떡도 하고 미역국도 끓이고 혼자 아픈 손을 감당

하며 열심히 짝꿍의 생일상을 준비 했다. 많은 준비는 아니라도 정성껏은 했다. 그리

고 생일날 아침에 오붓하니 아침을 먹었다. 점심때가 되는데 외출을 하자고 했다. 인

생이 장돌뱅이로 태어난 짝꿍은 집에 오면 누워서 일어나 앉아있기도 싫어하는 남자

다. 그런 그가 내 생일도 아니고 자기의 생일날에 주는 대로 받아만 먹고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나가자고 재촉이다. 호수가라도 돌아 주려나 싶어서 마냥 좋아서 쫄래쫄

래 따라 나섰다. 그런데 아주 근사한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다. 그리고 감동

도 함께 주었다.

 

"나는 손이 다쳤다고 해서 대충 넘어갈 줄 알았네.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 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네. 만날 돌아다니는 못난 놈 만나서 사느라고 외출도 안하고 자기를 절

제해 버리는 마누라 성미를 왜 모르겠는가? 나는 돌아 다니면서 좋은데도 가고 맛있

는 것도 먹고 남자라서 자유로운디 자네는 성미가 내 반대적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살

지 않는가?! 가는데 라고는 성당뿐인디, 성당에도 못 가게 되어버려서 어서 빨리 이사

를 해 줘야 남편의 자격이 있을 것 인디, 그것도 여의치가 않고 모든 것이 내 탓이네.

재능도 많고 끼도 많고 여흥도 많은 사람의 기를 내가 못나서 꺾고 사는 모습이 가슴

이 아프다네. 그래도 군소리 않고 절제해 버리는 것을 세상천지 나 말고 누가 불쌍히

여기것는가?! 여자팔자가 두레박 팔자라는디 못난 놈 만났으니 자네도 못난 사람이

되어 버린거여. 그것을 내가 알고 있네. 그것을 세상을 향해 침묵으로 오로지 입 다무

는 침묵 하나로 이겨내는 지독한 자네라는 것도 내가 알고 있네. 조금만 참으소. 18년

동안이나 해 온 소리지만 나는 지금도 조금만 참으란 소리밖에 못 하네. 노력을 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것은 자네가 하느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잖은가?! 그래도 그런 하느님

만 잘 믿으라고 허니께 잘 살을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여. 그래도 얼마나 행복헌가?!

손이 다쳐서 다른 여자들 같으면 외식을 하자고 할 것인디 그 힘든 시루떡까지 해서

정성을 부려주니께 얼마나 행복헌가?! 건강을 조심허게. 돈 벌어 놓고 몸이 아프면 좋

은 세상이 와서도 같이 좋은 구경도 못 다니고 그러면 되것는가? 그랑께 언제나 몸을

유지허도록 해야혀."

짝꿍의 마음을 들으면서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맛이 있는지도 모르고 짜디짠 눈물에

국을 말아서 먹었다.

"오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혀. 그동안 너무 어려워서 그렇게 좋아허는 공연도 한

번 못 봤는디 오늘은 공연도 예약허고 사고 싶은 것도 있으면 사 줄텡께 사고 그려. 돌

아다니면서 푼돈을 좀 벌었으니께 자네한테 써 줄 것이네. 미장원 한 번을 안 가고 집

에서 혼자 머리 자르고 그걸루다가 잇대서 영화 한 편씩 보는거 알면서 나도 남자인

디 워째 각시 아까운것을 모른당가?! 다 알으네. 남들처럼 모임이 있어서 외식 한 번

을 허는가 술을 한 잔씩 먹기를 허는가 동네 여자들 하고 커피라도 마시면서 키득 거

리기를 허는가? 오로지 집에만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그렇다고 상처 입

은 자네더러 이래라 저래라 허는 것도 죄가 될 것 같고, 내가 해 줄 것은 이사가는 것

인디 그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모든 것이 내가 죄인이네. 내가 못나서 죄인거여. 세상

천지서 자네편이 되어서 이해 해줄 사람이 나 빼고 누가 있것는가? 그런디 내가 이렇

게 모자라서 죄송허네. 못난 놈 참아주고 사는 자네한테 그저 언제나 고맙고 감사허

네. 건강허도록 노력허게나. 마음을 항상 달래서 큰 병이 생기지 않게 해야되는거여.

늙어서라도 젊어서 못해 본거 다 해 보고 행복해야 될거아니여?! 건강 유지 허도록허

게. 자네가 건강해야 내가 열심히 사는거여."

 

그래서 짝꿍의 생일날에 각시가 받은 선물이 <이미자 45주년 기념 공연> 티켓 두 장

이었다. 나는 7080 가수들의 공연이 더 가고 싶었지만 짝꿍이 함께 갈 수 있는 공연을

택한 것이다. 짝꿍은 이미자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나는 짝꿍을 더 좋아하고. 그러니

까 짝꿍이랑 같이 가서 볼 수 있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사

람의 행복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가난하지만 그렇게 멋진 공연을 볼 수 있는 우리

부부의 풍요로운 마음에 대하여 대단한 자긍심이 생겼다. 우리 서로 동감을 표시하며

만족을 했다.

"돈이 없어서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돈을 두고도 아까워서 못 오는 사람도 많을 것이

고, 비싼 파마하기는 쉬워도, 비싼 옷 사기는 쉬워도, 어울려서 맛있는 거 먹기는 쉬워

도 이런 공연을 보려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네. 우리각시가 멋쟁이여서 내가 출세허

네. 허허허"

 

45년을 노래 한 이미자씨도 인생의 여정이라는 굴곡에 대해서는 공인이기 때문에 우

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헤아리기 어려운 유혹이나 시련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

금 64세의 이미자에게 누가 감히 인생여정을 논하겠는가? 이미자씨가 가곡을 부르면

<이미자 가곡>이 되고, 이미자씨가 팝송을 부르면 <이미자 팝송>이 되고, 이미자씨

가 후배의 노래를 부르면 모두가 <이미자 노래>가 되고, 이미자의 목소리는 이미 바

다처럼 넓고 산처럼 깊은 포용력으로 소리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노래

가 천상이 주신 특별한 이미자 소리에 흡수되어 <이미자 노래>로 탈피를 하는 밤이

었다. 그녀에게는 노래가 있다. <이미자 노래>! 사람들은 그 노래를 기억하고 역사도

이미자의 노래만 기록 할 것이다. 이미자는 노래가 그녀의 전부이며 행복의 모든 것이

었다. 45주년 기념 음반 "내 영혼 노래가 되어!"에서도 그녀의 탈고 된 승화의 노래를

읽을 수 있었다.

성 목요일 밤의 또 다른 축제에 미사참례를 거른 죄송함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충분한

발견이었다.

 

나의 삶도 인생 여정의 한 토막을 어렵다고 하며 넘기고 있다.

훗날에 나도 늙어지면 지금의 모든 사연들은 여과되고 감사할 일만 초연히 자리할 것

이다. 나는 나의 몫을 아직 모르고 있다. 다만 마지막 나의 모습도 신이 주신 나의 몫

을 발견하고 한없는 주님의 관심에 감탄하면서 감사라는 인용구가 부족하다는 만족

감으로 행복하고 싶다. 나도 그 세월쯤이면 세상을 향해 나의 그릇으로도 모든 것을

수용하고 싶다. 그 이루심이 하늘의 것이라고 인정하며 확신하는 그런 날을 갖고 싶

다. 주님의 은혜로 그 모든 과정들을 온전히 마치고 나의 몫이 그저 평범한 대로 작게

나마 남으리라. 주님께서는 30년을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보내셨고, 나머지 목적

이 크셨으므로 3년이라는 단기적 공생활로 부활이라는 영광된 선물을 남기셨지 않

은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잖

아요.~♩~♬~♪~ "

행복이란 오직 주님이 주신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다.

 

ㅡ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 증인이십니다. 사도행전5,32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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