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2.23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말라3,1-4.23-24 루카1,57-66
"위대한 침묵"
입소문은 놀랍습니다.
저희 수도 형제들은 이미 3년 전에 다운 받아 본,
카르투시안 수도원을 소개한
‘위대한 침묵’이란, 약 3시간 정도의 영화가
상영 기간을 12월말까지로 연장했으며 표도 매진되었다 합니다.
몇 자매들도 영화 본 이야기를 자랑했습니다.
순간 침묵을 목말라 하는 현대인의 영적 갈증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음과 공해 가득한 세상에서
수도원의 위대한 침묵을 통해
생명의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은 영적갈망의 반영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침묵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생래적으로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입니다.
참으로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던 수도승들이었습니다.
옛 구도자들 역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아 고독과 침묵의 사막을 찾았습니다.
하여 인위적인 사막 분위기를 만들고자
수도원의 침묵은 일상적이며
특히 끝기도 이후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대 침묵을 지킵니다.
얼마나 필요 없는,
비본질적인 일에
마음과 시간, 정력을 낭비해가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인지요.
날로 황폐해 사막이 되어 가는 마음들입니다.
하여 저도 집무실 벽에 한자로 침묵이란 글자를 써서 붙였습니다.
침묵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깨어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끼고, 잘 맛보고, 잘 말하기 위한 침묵입니다.
진공 상태의 텅 빈 죽은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깨어있는 빛나는 침묵, 충만한 침묵입니다.
마음과 몸이 시끄러워 주변에서 놓쳐 버리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침묵입니다.
하느님은 침묵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시끄러우면 도저히 하느님이 얼마나 좋은 지 체험하지 못합니다.
침묵은 바로 기도입니다.
침묵은 지혜입니다.
침묵은 인내요 기다림입니다.
침묵은 하느님 사랑의 현존입니다.
그러니 침묵 체험은 바로 하느님 체험입니다.
침묵 중에 치유되고 정화되고 충전되는 영혼, 육신입니다.
말 없어서 침묵이 아니라 마음과 몸이 고요해 침묵입니다.
침묵에서 배어나오는 참말이요 평화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중심의 지도자에게 침묵의 영성은 절대적입니다.
중심이 고요하고 깊을 때 주변이 평화롭고 안정됩니다.
중심이 시끄럽고 얕으면 주변 역시 혼란스럽고 시끄럽습니다.
침묵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평생 끊임없는 침묵 수련에 정진해야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잠정적으로 벙어리가 된 즈카리야에게서 침묵을 묵상했습니다.
하느님은 침묵을 통해 즈카리야를 교육시키고자
잠정적으로 그의 입을 닫아 버려 침묵피정기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루카1,20).
아마 벙어리가 된 이 피정기간 동안
즈카리야는 많은 영적체험을 했을 것이며,
마침내 즈카리야의 깨달음의 깊은 경지가
오늘 복음의 다음 묘사에서 그대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썼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침묵을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요한’이란 이름이요,
침묵에서 샘솟는 즈카르야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우리 수도승들의 침묵에서 샘솟는 매일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침묵의 질과 함께 가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할 말을 모두 미사와 성무일도에 담아 버리면
저절로 말은 적어지고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보면 꼭 필요한 말 보다는 대
부분 쓰레기 같은 말들 아닙니까?
오늘 복음의 분위기를 보십시오.
복음 장면의 중심인 즈카리야의 깊고 고요한 침묵으로 인해
주변 분위기 역시 깊고 고요한 침묵의 분위기입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거룩한 침묵에 의한 두려움의 분위기 형성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침묵 중에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심을 감지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침묵입니다.
깊은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움직임을,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큰 두 영적 질병은
침묵하지 못하는 것과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이라 합니다.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다 보면 하느님을 알아채기는 요원합니다.
오늘 1독서의 말라기 예언자,
분명히 침묵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구원역사를 꿰뚫고 계신 침묵의 하느님은
말라키 예언서를 통해 또 하나의 엘리야, 요한의 등장을 예고하며,
이 예언은 오늘 복음을 통해 실현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깨어 침묵 중에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침묵 중에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정화해주시고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전시켜 주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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