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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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09-12-25 | 조회수44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09년 12월 27일
루가 2, 41-52, 골로 3, 12-21.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0년에 처음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없었던 축일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출현한 유럽의 산업 사회는 인류의 기본 공동체인 가정의 가치를 훼손하였습니다. 과거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산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가정 중심으로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사랑의 온상인 가정의 가치는 점차 손상되고, 산업체 중심으로 가정생활도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 환경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낀 교회는 성가정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한 가정 안에서 자랐습니다.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곳이 가정이고, 사랑과 섬김을 배우는 곳도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가 열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아들을 잃어버린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찾아 사흘을 헤맨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를 찾았습니다.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나무라는 부모에게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토론하는 예수, 그들이 경탄하는 예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는 예수, 소년 예수에 대한 이런 언급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믿는, 신앙 공동체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율법 학자들을 상대할 만큼 현명하였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으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일컬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그분이 가졌던 확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가 생각하던 하느님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율법 준수를 원하는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전통을 철저히 따를 것을 원하는 하느님, 혁명당이라는 과격파는 무력으로라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하느님, 에쎄네파는 금욕적 수도생활을 원하는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율법과 전통을 소홀히 하면,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데에 그들은 일치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도 유대교의 하느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성토하고 비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로 사는 것이 정의라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믿은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에게 하느님은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자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모와 같은 아버지이십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로 흘러들어서 자녀가 성장합니다. 부모에게서 배운 사랑이 있어 자녀도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은 예수님이 실천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흘러들게 하여, 자기도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삽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에서 들은 콜로새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자비를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고...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준다...사랑을 실천한다...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실천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보여 주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2009년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또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우리는 모두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일도, 후회스런 일도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내가 잘못 해서 부끄러운 회한(悔恨)으로 남은 일도 있고, 나와 관계없이 닥친 불행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은혜로운 일들도 우리 각자에게 많았습니다. 그 일들 안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나에게 상처로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묵시 21,5)에게 맡겨 드립시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넘쳐흘렀다.”(로마 5,20)고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새롭게 하십니다. 내가 이웃에게 준 상처와 내 마음에 남은 미움의 앙금들을 하느님에게 보여 드리고, 그분이 당신의 자비를 불어넣으셔서, 모두를 새로운 것으로 만드시도록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는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좋은 일들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해가 과거라는 망각 안으로 흘러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회상에서 간직해야 할 것은 은혜로웠던 일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 순간들이었습니다. 그 은혜로우신 손길을 우리에게 전달한 분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있었거나 잠시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이들입니다. 은혜로운 눈길, 은혜로운 손길을 남기고 지나간 이들입니다. 그 은혜로움이 있어 나의 삶은 보람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빴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 눈길과 그 손길을 예사로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은혜롭게 회상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그런 눈길과 그런 손길들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가지만, 그런 눈길과 손길들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하느님이 아버지 되시도록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의 가정은 가족 모두가 잠시 쉬고 나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학생이 되면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각자가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오늘의 세상입니다. 해가지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기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의식하며 삽니다. 선입견이나 이해관계 없이 서로 들어주고 말하면서 삽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처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횡포는 진화과정의 동물 단계에서 받은 유산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를 실천하는 마음이 살아있게 해야 하는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것을 위한 훈화가 아니라, 그런 실천이 돋보이는 가정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가다듬어 새해를 맞이합시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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