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는 길" - 12.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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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09-12-27 | 조회수58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2.27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집회3,2-6.12-14 콜로3,2-21 루카2,41-52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는 길"
모든 가정이 성가정 공동체로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보금자리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은 계속 성가정 공동체에 축복을 내리십니다.
저절로 성가정 공동체가 아닙니다.
저희 성가정 수도공동체 역시 똑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성가정 공동체 성원 모두의 끊임없는 노력이 절대적입니다.
세상에 문제 없는 유토피아 이상적 성가정 공동체는 어디도 없습니다.
문제없어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항구한 노력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세상에 성가정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부부들,
참으로 거룩한 순교적 삶입니다.
사실 성가정을 지키는 것보다 거룩하고 위대한 직무는 없습니다.
달리 성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중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부부들이 살아있는 성인들입니다.
여기 성모상 옆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
참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요셉 부부가 내적으로 얼마나 힘든 상황을 겪어냈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두 분 다 영웅적인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의 노력으로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얼마 전 한국을 잡아먹는 개미지옥이란 글을 소개합니다. “대한민국엔 4개의 개미지옥이 있다.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개미지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개미지옥.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개미지옥에 빠진 무력한 국민들이다.
최초의 개미지옥은 10대에 등장한다.
빠른 경우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주할 수도 있다.
그 개미지옥의 이름은 ‘사교육’이다.
두 번째 개미지옥은 20대에 등장한다.
본의 아니게 ‘88만원’ 세대가 되어버린 20대들은
‘청년실업’이라는 개미지옥을 통과해야 한다.
세 번째 개미지옥은 30대에 등장한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는 별명을 얻게 된 대한민국에서 30대는
‘내집 마련’이라는 개미지옥을 통과해야 한다.
마지막 개미지옥은 40대 이후 등장하는데,
40대에 마주할 수도 있고 50대나 60대,
재수가 없으면 80살이나 90살을 넘어 죽는 그 순간까지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는 ‘불안한 노년’은
그야말로 생존 그 자체만이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인생에서 하나의 개미지옥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벅찰 터인데
한국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날까지
무려 4개의 개미지옥을 거쳐 가야 한다.
각각의 개미지옥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순간에 낙오하게 되고,
즉시 춥고 배고픈 인생으로 전락한다.
그럼, 4개의 개미지옥을 다 통과했다면 과연 행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을까?
슬프게도 개미지옥이 거듭될수록,
'부의 대물림' 현상에는 익숙해지고
허무하게도 개미지옥을 모두 통과하고 나면,
이미 인생의 끝자락임을 알게 된다.”
과연 이 개미지옥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가정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 개미지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개미지옥의 세상 안에 성가정 공동체의 천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천국의 성가정 공동체를 건설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마음이 맞아, 서로 좋아 공동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야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함께 사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는 필수입니다.
복음의 마리아, 요셉 부부의 가정 역시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이었음이 복음의 서두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보이는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바로 이 가정이 향하는 중심이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성전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성가정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도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중인 예수님을 발견한 그의 부모는
무척 놀랐다 합니다.
성전 한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임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가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를 이룹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노력의 합작품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말씀 공부와 끊임없는 기도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부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드리십시오.”
혼자도 좋지만 함께하면 더욱 좋습니다. 함께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나누는 것이며
함께 시편과 찬미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성가정 공동체에 형성에 이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성가정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공동체에 해당된 수행입니다.
막연한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끊임없이 말씀 공부에, 찬미기도 노래에 충실할 때
‘이기적 나’를 넘어 하느님을 닮은 이들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사랑의 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이래서 먼저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없이
우리 인간의 사랑은 너무나 약하고 변질, 오염되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의 통로가 될 때 지칠 줄 모르는 용서요,
하느님 사랑의 통로가 될 때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모였다 하여, 세례 받았다 하여 한 몸 공동체가 아니라
이런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 있어 깊어지는 한 몸의 공동체입니다.
숨 쉬듯이, 밥 먹듯이 용서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가정 공동체에 불러 주신 목적이 드러납니다. 바로 서로 용서를 배우라, 사랑을 배우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끊임없는 용서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공동체에서의 용서와 사랑의 수행의 길 말고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매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내 영혼과 육신이 살기위해서도 용서와 사랑은 필수입니다.
영혼의 암과 같은 증오와 미움은 공동체를 파괴하기 전에 나를 파괴합니다.
감사와 평화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끊임없이 감사하고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역시 하느님은 감사와 평화의 샘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샘솟는 감사와 평화입니다.
감사하십시오.
생각하면 온통 하느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입니다.
이렇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놀라운 감사입니다.
감사할수록 긍정적 낙관적 행복한 삶이요 쏟아지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기 까지
하느님은 물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은혜를 입었는지요.
감사해서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할 줄 몰라 불행이지 감사할 줄 알면 행복입니다.
감사에서 솟아나는 기쁨이요, 바로 이게 참 믿는 이들의 표지입니다.
백 마디 말보다 이런 모습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이며 살아 있는 복음 선포입니다.
한 번 감사했던 하느님에 대해, 감사했던 사람들에 대해 묵상해보십시오.
영적 삶의 깊이는 감사와 함께 갑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고 형제들에 감사할 때 저절로 이뤄지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릴 때 내적 안정과 평화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받쳐 주기에 비로소 공동체의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요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당신의 평화로 우리를 흠뻑 적셔 주십니다.
평화에 이은 감사에 대한 당부 말씀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감사의 능력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 시편 찬미가
우리를 감사의 사람으로, 감사의 성가정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내와 기다림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인내의 기라림 없이 성가정 공동체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항구한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이요, 인내와 기다림을 통해 참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이렇게 수도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여기 수도자들,
깊고도 깊은 인내의 사랑입니다.
인간적 피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깊은 사랑의 반영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은 얼마나 깊고도 깊은지요.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참 맹랑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성모님은 예수님의 이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끊임없이 인내하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참지 못해, 기다리지 못해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부모들 얼마나 많습니까?
인내와 기다림은 사랑의 표현이자 동시에 믿음의 표현입니다.
동정과 호의와 온유와 겸손이 내포된 인내의 사랑이요,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사랑입니다.
인내의 절정은 노부모에 대한 사랑에서 들어납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 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노부모 잘 모셔서 잘못된 사람은 하나도 못 봤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축복은 자녀들의 축복이니
그 부모를 보고 배워 효성스런 자녀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집회서는 이 점을 분명히 집고 넘어갑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고, 자녀들에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성가정 공동체의 건설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개미지옥 세상을 넘어 천국을 살 수 있는 길은 성가정 공동체의 건설하나뿐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 거장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신
성가정 교회공동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내 공동체를 이런 성가정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말씀과 기도로, 용서와 사랑, 감사와 평화, 인내와 기다림으로
이루어지는 한 몸 성가정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이런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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