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공동체 마을] 인도의 실험도시 오로빌 - 홍은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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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연 | 작성일2010-01-03 | 조회수97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공동체마을] 인도의 실험도시 오로빌 (Auroville)
《또 다른 세계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세계와 사람의 조화를 꿈꾼다.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지구촌, 인간과 자연을 한몸으로 엮는 생태 마을,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워서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려는 영적 공동체, 그리고 숙명과도 같은 빈곤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금융시스템…. 구 소련 붕괴 후 10년이 넘도록 휘몰아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폭력적인 반(反) 세계화운동 속에서도 이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의 이상주의적 열정은 인간의 역사만큼 연원이 오래된 것이며 앞으로 오래 지속될 꿈이다. 동아일보는 세계 곳곳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이들의 꿈의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인도의 육중한 데칸고원이 남동쪽으로 뻗어가다 벵골만에 잠기기 직전의 끝자락에 오로빌(Auroville)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인도 남부의 거점도시 첸나이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해변도로를 따라 3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다. 서울에서 그곳까지 가는 데는 거의 하루가 걸린다.
인도에서도 외진 곳이다. 이곳에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세계 36개국에서 온 세계인 1683명이 모여 산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번꼴로 수준 높은 연주회가 열리고 세계 건축가들이 맘껏 상상력을 발휘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34년 전인 1968년 2월28일 이 마을의 착공식이 열렸을 때 124개국에서 2명씩의 대표들이 참석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가져 온 흙을 묻었다. 이에 앞서 유네스코는 1966년 오로빌의 탄생을 지지하는 총회 결의문을 채택했다.
오로빌이 문화 종교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의 단합을 추구하는 유엔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빌의 정신적 뿌리는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1872∼1950)와‘마더(Mother)’로 불리는 그의 정신적 동반자 미라 알파사(1878∼1973)에 있다. 스리 오로빈도는 인류 최대의 적은 인간의 내부에 있으며, 자기 성찰에 정진하면 인간의 의식도 신성을 향해 진화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더’는 사방을 둘러봐도 초목이라고는 벵골보리수 한 그루밖에 없던 척박한 이 땅을 오로빌의 터로 지정했다.
화려한 착공식이 끝나고 남은 사람은 고작 7명. 이들은 아열대의 태양에 덴 것처럼 붉은 대지를 손으로 파헤쳐 씨를 뿌리고 여린 묘목을 심었다. 이것이 지금은 기적처럼 빽빽한 숲으로 바뀌었다. 착공식 이듬해에 오로빌에 온 초창기 멤버 베르날은 “개척자들은 세계 최초의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열사병과 굶주림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사람들도 뿌리를 내렸다. 오로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오로빌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베르날씨는 “아이들에게 바깥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주지만 80%가 다시 오로빌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우샤(28·여)는 91, 93년 두차례 프랑스로 유학했지만 이곳으로 돌아와 인도인과 결혼, 오로빌 3세대를 낳았다. 우샤씨는 “바깥은 너무 추웠다”고 말했다.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목다(28·여)는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말했다.
오로빌은 마티르만디르라는 명상의 성소를 중심으로 한 직경 5㎞의 원형 도시다. 밀림의 그린벨트가 외곽의 원주를 이루고 그 안에 주거지대 문화지대 산업지대 국제지대가 마티르만디르를 향해 물결치면서 전체적인 도시가 은하수를 닮았다.
이 원형의 도시에서 유기농법과 환경친화적 적정기술 연구, 대체의학, 에너지 재활용, 토양과 수자원 보존, 내면교육 등 다양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은 인간과 인간의 실험이다.
4월 26일 오후 5시 원형극장에서 주민총회가 열렸다. 이날 안건은 투표의 도입 여부. 총회의 의장은 따로 없다. 안건 제안자가 사회자다. 오로빌은 지금까지 만장일치제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인구가 불어날수록 만장일치는 어려워졌고 의사결정이 지연돼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는 게 제안자의 주장. 그러나 이날도 의견이 엇갈린 채 총회가 끝났다.
래스트 스쿨(중학교 과정)의 교사 딥티는 투표도입에 대한 거부감을 이렇게 설명했다.
“투표는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소수의 마음 속에 미움이 싹트고 이것이 단단해지면 폭력으로 나타난다. 단적인 예가 9·11 테러다. 신속과 효율, 발전과 같은 가치는 서구식 실용주의에 입각해 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것보다 어떻게 결정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직접 민주주의에 만장일치를 결합한 초유의 의사결정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長)’을 두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학교, 공장, 농장 어디에도 대표가 없다. 모두 동등한 자격에서 문제를 풀어나간다. 성(姓)도 모른다. 여기서는 이름만 쓴다.
모두가 참석해야 하는 공동체 의식도 없다. 누구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 만약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하면 일을 가르쳐준다. 그래도 농사일 취사 전기공급 전화 도로보수 의료 의복 미용 등 공동체의 필수기능이 마비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급자족의 도시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오로빌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면서 유엔과 유럽연합(EU),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 독일 미국 등으로부터 매년 400만달러(약 52억원)에 가까운 기금을 지원받는다. 오로빌의 연간순익은 100만달러에 불과하다. 오로빌에서는 소비하는 과일의 80%, 야채 20%, 곡식 10%밖에 자체 생산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오로빌은 물질적 세계화를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사적 이기심의 추구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결국 사회적 조화로 이어진다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서는 정신적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로빌〓홍은택기자
한국인 최초의 오로빌리언 이현숙씨 “이상적 마을 꿈꾸며…”
“네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증조할머니 밑에서 홀로 자라났다. 이혼 후 프랑스로 떠났던 어머니가 초청해 프랑스에서 1년간 살았다.
곧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반드시 언어의 장벽만은 아니었다. 이미 스리 오로빈도와 마더의 사상에 심취했던 어머니가 인도에 가자고 해서 따라나서 오로빌까지 왔다.
그때가 84년 21세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내 두 다리로 굳건히 설 수 있는 곳을 찾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빌에 혼자 남았다. 집에는 문도 없어 뱀이 무시로 드나들었고 물리기도 했다. 야자수 잎으로 가린 지붕에서는 비가 샜다.
수중에 300루피(약 8000원)밖에 없어 밥을 굶었다. 학교에서는 점심을 공짜로 주기 때문에 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가르칠 게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받아줬다. 나는 아이들과 뛰어 놀면서 한국동요를 가르쳤다. 그랬더니 학교에서 고맙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이다. 이미 아이 엄마가 된 제자들이 지금도 나를 보면 산토끼를 부른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뭐가 됐을까. 미스코리아의 용모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공부도 못했다. 집안배경까지 어지럽다. 나는 한국에선 없었던 희망을 이곳에서 찾았다.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어디든 내가 일하고 싶은 곳에서는 나를 받아줬다.
지금은 행정을 맡고 있다. 프랑스어, 영어, 현지어인 타밀어도 하게 됐다. 말을 배우면서 사람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나보다 지독히 어려운 삶도 있다는 걸 깨닫자 부모 없이 자라난 상실감이 사라졌다. 내 힘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면서 부모를 이해했다. 부모가 나를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문제였다.
내 안의 질곡에서 벗어나면서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오로빌리언들의 이상에 흠뻑 취해 청년기를 불태웠다. 지금은 인구도 많이 늘고 마을도 커져 과거의 이상이 희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거의 오로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오로빌〓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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