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I. 삼위일체
1.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A.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
지금까지 우리는 계시와 믿음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 계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진리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이고, 요한 사도는 이 삼위일체 신비를 이렇게 짧게 정의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 4,8)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니시라 세 분이십니다. 누구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 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마태 28,19)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하느님은 한 분이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조: 마르 12, 29. 32)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율법학자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분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한 분이 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 이전의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를,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창조 이래로 계시된 삼위일체 신비를 ‘구원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를 계시하신 이후에도 계속 이 신비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이단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되신 성자를 ‘하느님’이시라고 공적으로 고백한 복음도 맨 나중에 쓰인 요한복음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14,23: 17,11). 물론 성령님을 하느님으로 공적으로 인정한 것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삼위일체의 어려움을 말하는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왜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와 ‘어떻게 하느님은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 되시는 것일까?’였습니다.
성인은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선의 부재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즉, 빛이 없으면 어둠이 저절로 존재하게 되는 것처럼 선이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는 저절로 악이 들어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해변을 걷고 있었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자신이 파 놓은 구덩이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는 계속 이 일을 반복했습니다. 성인은 아이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바닷물을 다 이 구덩이에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인은 그것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사람의 머리로 하느님을 이해하려 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 사라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삼위일체를 인간의 영혼의, 기억, 지력, 의지력(memoria, intellectus, voluntas)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혹은, 사랑하시는 분, 사랑 받으시는 분, 사랑 자체이신 분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남자와 여자와 자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하려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도도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아는 것이 곧 사랑을 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느님을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