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창조주 2
그러면 이젠 ‘성자’께서도 창조 때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지 살펴봅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1-4)
요한은 새로운 창세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한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여 요한도 ‘한처음’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성경의 첫 단어를 따서 그 책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렇게 본다면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제목은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 하필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정했을까요? 당시 그리스 철학과 관계가 있기도 하지만 요한이 사용하는 ‘말씀’은 ‘로고스’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말씀’은 하느님이셨고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함은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자를 ‘말씀’으로 표현했다면 창세기에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창세기에서 아버지도 계시고 성령님도 계시지만 ‘말씀’은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성자인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주기 위해서 요한은 ‘말씀’이란 단어를 성자와 동일시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 1,3)
만약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빛이 생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생각만으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시고 그 생각을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생겨난 것 중에 가장 첫 번째 것이 ‘빛’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빛’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세상의 ‘빛’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말씀으로 옮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숨’입니다. 숨이 없으면 생각이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이신 ‘아버지’와 ‘말씀’이신 ‘성자’를 이어주시는 분이 ‘숨’이신 ‘성령님’인 것입니다.
세상 창조 때의 하느님은 “창조주 - 숨 - 말씀”의 삼위일체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집니다. 창조주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생각’으로 바꾸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 숨 - 말씀”, 이것은 바로 인간에게도 있는 삼위일체의 모습입니다. 인간도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고 그러자면 숨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생각도 없고 말도 하지 못합니다. 단지 감정에서 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을 냅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닮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집니다.’ 만약 하느님을 닮았다면 생각하는 것을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대왕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란 커다란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 도시를 알렉산더가 직접 만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알렉산더는 단지 그의 ‘생각’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절로 도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알렉산더가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생각’과 그가 한 말, 즉 ‘알렉산드리아’가 하나가 되려면 그 중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힘이 강력해야 합니다. 만약 동네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해서 또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과 말을 이어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 말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알렉산더와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지니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엄청난 효과를 냅니다. 그 ‘말씀’으로 표현된 ‘생각’을 이루어주시는 ‘완전한 능력(힘)’을 성령님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까? 하느님을 닮았다면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합니다. 아무리 장담을 해도 그것이 안 이루어지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랑이 식어지고 다른 사람이 더 좋아지기도 하고 다음부터는 술을 안 먹겠다고 장담하지만 또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생각’과 ‘말’을 이어줄 수 있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에서는 ‘하느님의 영, 숨, 바람’으로 나오는 성령님의 역할이 완전해야만 생각과 말이 일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들이닥쳤으므로, 삼손은 손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새끼 염소를 찢듯이 그 사자를 찢어 죽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일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판관 14,6)
삼손에게서 나오는 힘의 원천은 자신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만약 자신이 그런 힘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머리가 깎여도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머리를 깎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약속입니다. 즉,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인간의 욕정에 빠질 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영성생활과 일치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성령님의 힘을 잃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제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고 성령님께서 충만히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진정 강한 사람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