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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117) 멀리 보이는 푸른 잔디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0 조회수408 추천수1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7185       작성일    2004-06-07 오후 1:58:12
 
 

2004년6월7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ㅡ열왕기상17,1-6;마태오5,1-12ㅡ

 

  (117) 멀리 보이는 푸른 잔디

                                                  이순의

                       

 

가축을 위해 본격적으로 가꾸어 재배한 목초지가 아닌 노지 잔디밭에 않으면 빈 공간

이 듬성듬성 비어있다. 사람의 심리는 풀이 많아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하려 한다.

좀 더 멀리 보이는 초록이 고와보여서 가보면 그곳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된다.

근래에 자식의 진로를 걱정하느라고 상당한 고민을 하며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일반적인 성소도 고민해 보았지만 성직이나 수도성소에 대하여도 상당한 고민을 해

보았다. 그 갈등에서 오는 시야들을 나열해 보기로 한다.

 

어쩌면 자식의 성소를 고민하기에 앞서 평신도의 시각이 더 부각된 것 같아서 죄송하

고 안타깝기도 하다. 현재 교회가 보여 주는 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도 가져 본

다. 교회 안에서도 세상만큼이나 다양한 일거리와 각색의 사람들과 각양의 관계들 안

에 살고, 이루고, 맺으며 고락을 격고 있다.

때로는 사회보다 나아서 열정을 불사르기도 하고, 때로는 차라리 구린내 나는 변소만

못한 이중창 안의 모습에 가슴 뜯으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이곳도 세상인 것을!

세상과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세상과는 구별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

얽히고 섞이고 소란한 삶을 벗어나 고요한 영혼의 공간을 바라고, 그에 따르는 소속감

에서 얻어지는 자기만족 또한 맹목적으로 취득되기를 바라는 참으로 오묘한 기대심

리의 산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곳이 멀리 보이는 잔디밭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상당한 수련과 발견의

연마를 동반해야 한다. 듬성한 잔디가 좋아서 자리를 잡았다가 이내 엉덩이에 짓이겨

져 흙먼지만 폴폴 나는 자리에서 또 멀리 보이는 푸름을 보며 일어선다.

그 곳인들 초록이랴?!

어떤 이는 처음부터 초록을 포기하고 흙먼지에 앉아서 끝을 보려 할 것이고, 어떤 이

는 푸름만 보느라고 안주하지 못 하고 먼 자리만 처다보다가 끝을 보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그나마 좀 나은 풀밭을 찾아 부족한 촉감이라도 만족하며 끝을 맞이하기도

할 것이다.

세월을 살아 본 교회 삶은 이런 곳이 아닌가 싶다.

특히 자식의 진로를 고민하는 마당에 서있는 부모의 심정은 멀리 보이는 푸름의 이면

에 가린 흙먼지를 알고 있으므로 그 곳에 자식을 앉히고 싶지가 않다.

 

본당 신부님을 보면 90%는 미친놈에 10%만 멀쩡하여야 사는 것 같고!

교구 신부님을 보면 93%는 실성을 하고 7%만 온전해야 사는 것 같고!

유학파 학자신부님은 97%는 정신이 나가고 3%만 제대로 갖춰야 사는 것 같고!

특수사목 신부님을 보면 99%는 타락을 하고 1%만 제 정신이여야 사는 것 같고!

수도회 수사님을 보면 92%는 노가다 십장에 8%만 부자 되면 사는 것 같고!

수도회 신부님을 보면 90%는 거렁뱅이에 3% 미친놈에 3% 타락하고 4%만 사람 같아

야 사는 것 같고!

세상 모든 부모가 융단을 깔아놓고 자식을 앉혀서 3천의 시종과 백가지의 산해진미와

깃털보다 보드란 의복을 입혀서 호위호식을 시켜주고 싶은 게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제 정신이라고는 도무지 허락이 안 되는 그런 인생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

끔찍한 비극이다.

게다가 가끔 명동에 나가면 판대기의 앞판 뒤판으로다가 엄청난 사연을 써서 짊어지

고, 젊음이 재미가 좋았을 여인네의 사연을 쭈구리고 앉아 읽어 볼라치면, 명단에 오

르신 영광들이야 당사자의 변론을 못 들어 봤으니께 모르지만서두, 젊은 시절의 그 여

인이 차암 근력이 대단 하였을 생각을 하며, 저렇게 근력 좋은 불여우들이 득실득실 

혀서 훗날 자식의 이름이 저 명단에 오를 걸 예상해 보기도 한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황우장상의 근력으로 흔들어대는 백년 된 불여시의 꼬리를 워찌께

감당하랴 싶은 생각을 허면....... 그냥 생체분해를 시켜서 정자는 아빠주고 난자는  엄

마주고 조용히 근심일랑 거절하고 살고프다.

그래도 그 여인의 판대기는 보고 말을 수 있는 내용이다.

"본부장님, 여기 모텔입니다. 정신 차리시고 숙소에 드셔야지요."

酒님을 만나 정신 놓은 아저씨를 능숙한 솜씨로 보듬어다가 방에까지 모셔놓고, 신분

보장 해 준다고 차까지 빼서 다른 곳에 피신시켜 주는 멀쩡한 여인네들!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주변에 머문 사람이 머물게 되고, 친한 사람끼리 어울리게 되어

있으며, 그 허물이 무너지면 결단이 상실되게 마련이다. 이런 인간관계 안에서 결단을

상실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거나 결단을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

직자가 있다면 그건 짜가다. 스스로 짜가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결단을 빨

리 선택하기를 바란다.

수천의 신자가 거룩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한 두 명의 신자와 허물이 무너진다면 수천

의 결단을 바랄 자격이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그런 정도야 인간이니까 라고 이해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어미가 자식의 허물

을 뭔들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수천의 신자가 비난을 한

다 해도, 어미의 눈으로, 아비의 눈으로 자식의 부족한 인간성에서 비롯된 미완의 허

물을 어미랑 아비랑이 감싸지 않으면 누가 감싸고 누가 편이 되어 줄 것인가?!

 

언젠가!

잘 아는 신부님께서 약간의 불미스러움으로 쉬게 되었는데 그 어머니의 모습이 얼마

나 고통스러워 보이든지 다가가 위로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다음 임지가 정

해 지지 않으면 신상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그 어머니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었다. 그런데 교회 신문에 신부님의 발령지가 발표되었다.

누구보다 먼저 어머니께 다가가서 축하를 드렸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

며 말씀하셨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눈 봉사 삼년이라는데, 하느님한테

자식을 시집보낸 신부님 엄마는 귀머거리 평생, 벙어리 평생, 눈 봉사 평생 해야 살아."

얼마나 가슴 아프고 애잔한 슬픔이 느껴지던지 반문을 했다.

"어머니도 그렇게 마음고생 하시면서 왜 저더러 아들을 사제로 키우라고 하세요?"

어머니는 단호 하셨다.

"그렇게 말하면 절대 못 쓰네. 어멈 가슴이 아무리 아파도 아버지의 뜻을 거절 헐 수가

없는 것이네. 아버지의 선택은 은총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큰 것인디 절대로 그렇

게 말 하면 못 쓰네. 내 가슴이 아프고 라도 우리 신부님이 무탈허게 잘 사시면 되제

거기다 이유를 달면 쓴당가? 절대로 그러지 말게. 자네는 '예'만 허면 되네."

 

나에게는 이런 어머니의 자질이 없다.

미치고, 실성하고, 정신이 나가고, 타락해야 살 것 같은 그곳에 자식을 보내고 싶지가

않다. 거렁뱅이 비럭질에 각설이 해다가 호강은커녕 딸린 잡식구들 퍼 먹이느라고 실

오라기 나풀거리는 와이셔츠 단벌짜리 아들을 어느 부모가 바라겠는가?!

나는 눈 봉사도 평생은 못 하것고, 벙어리도 평생은 못 하것고, 귀머거리도 평생은 절

대로 못 하것다.

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아빠 따라서 산으로 섬으로 유랑생활하며 살고 싶으다.

융단은 못 깔아 줘도 푸른 목초지는 깔아 줄 수 있고, 3천의 시종은 못 만들어 줘도 어

미 아비가 시종이 되어주고 싶고, 백가지의 산해진미는 없어도 공해 없는 음식은 먹여

주고 싶고, 깃털보다 보드란 의복은 입혀줄 수 없어도 근심 없는 옷은 입혀주고 싶고,

호위호식은 시켜줄 수 없어도 신상은 편케 해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감히 은총보다도 더 큰 무엇이 있다면 사제 어머니의 눈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사제의 자리는 어쩌면 멀리 보일 때 온전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푸름이 좋아서 다가갔

다가 육중한 골반의 무자비한 힘으로 그 푸름을 짓이겨 버리는 중생은 어쩌면 명동성

당 앞에서 판대기를 걸고 선 사람일 수도, 본부장님을 모텔에 잘 모셔주는 사람일 수

도 있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 그 푸름을 바라보며 만족하는 여유를 왜 상실하려 하

는가?! 뛰어 가 봐야 어차피 흙에 붙어 살아가는 여린 풀포기가 아니던가?! 혼자만 주

저앉아 짓이겨서 붉은 흙창을 만들어 놓고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

게 하지 말라.

 

어미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건다.

자식 없는 사제는 누구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나?

천주학을 한다고 박해를 하던 시대도 아니고, 세상은 넓고, 자유는 넘쳐나고,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못 이룰 것도 없는, 황홀한 유혹의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목숨을 건다고 헛맹세 하지 말고, 뜯겨지고 문드러진 어멈 가슴한테라도 목숨 걸고 살

아 보면 판대기 들고 서있을 여인도 없고, 본부장님이라고 불러줄 아짐씨도 없지 않겠

는가?!

 

사제! 그대의 모습이 또 다른 성소자의 본보기가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사제! 그

대의 모습이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절명한 무기로 바라보는 수천 신자들의 가슴이라

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대 어서 멀리 보이는 푸름으로 초원을 이루시기 바란다.

그대의 모습을 그대의 어린자식이 닮아가야 한다면 그대는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

자식을 낳지 않아서 모른다고 억지를 부릴 참인가?

나는 아직도 또 앞으로도 자식을 향한 주님의 지휘봉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식은 제 지휘봉을 찾아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를 것이다. 그 길이 고단하지

않도록 길을 닦아주고 싶은데 보이는 길이 너무 험난하여 닦아줄 엄두가 나지 않는

다. 진정한 성소가 어디란 말인가? 자식이 머물 진정한 터전이 어디란 말인가?

어미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고요해질 수밖에.......

 

어미 된 심정으로 모든 수도자와 성직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사랑헌당께. 잉!"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

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오5,12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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