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부
C. 하느님의 섭리
모든 하느님의 섭리는 앞에서 보았듯이, 크신 ‘하느님의 계획’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섭리’가 ‘예정’은 아닙니다. 예정설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대로 움직인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 되게 됩니다. 즉, 아담과 하와의 죄도 다 계획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죄를 지을 것을 아셔서 구원계획까지 다 세워놓으셨지만 결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악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나옵니다. 천사의 자유에서 사탄이 나왔고 인간의 자유에서 원죄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악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에 악을 선으로 이끌어 결국 영원한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인간의 자유를 시험하고 단련하는데 쓰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악도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허락하시는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것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고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기근이 든 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거두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창세 45, 4-8)
형들은 분명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요셉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다 뜻이 있어 악도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좋은 일처럼 보이든, 나쁜 일처럼 보이든 크게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요?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으니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한 말을 묵상해 봅시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사무 17,45-47)
다윗은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렸음을 압니다. 그럼으로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을 알리기 위한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 좋은 일을 당신의 섭리로 도와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두려워져서 숨었던 것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갖는 감정입니다.
모든 것을 섭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매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 닥치는 안 좋은 상황도 주님께서 좋은 결말을 내기 위한 은총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그래서 바오로는 어떠한 처지에서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대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서든 감사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그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구세주가 사람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구세주가 태어나지 않고 그분의 죽음으로 인한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실 수 없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분과 한 몸을 이룰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덕분으로 (오, 복된 죄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Exultet) 세상에 은총이 충만해 졌고 우리는 ‘잃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악을 넘어서까지 이루시는 계획이고 섭리이신 것입니다.
단지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섭리 안에는 ‘인간의 자유를 통한 협력’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지만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 구원 또한 성모님과 함께 시작하셨고 우리도 그 분 수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 분의 섭리 안에 우리도 협력하여 그 영광에 우리도 당당히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