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 주일 ; 견진성사의 의미: 어른이 된다는 것
사제는 축성 받는 날부터 성사집행의 의무가 생깁니다. 사제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사제로 서품 받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혹은 두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혼인한다면 자녀를 낳아 잘 키울 의무와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모든 사람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소명을 공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이 쓰여 있는 이사야서를 찾아서 사람들 앞에서 읽습니다.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성령을 내려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은 보게 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성령님이 내리시어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구원자로서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의 삶이 곧 당신의 예정되어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기름부음, 즉 성령님을 받으면서 동시에 이루어야 할 ‘소명’까지도 지니게 되십니다.
저는 이것을 견진성사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서 처음에 내리신 때는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우리들도 세례를 받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사해지고 성령님을 처음 받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신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보이지 않게 아버지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두 번째 기름부음 때는 당신의 “구체적인 소명”을 선포하십니다. 견진성사는 어른이 되는 성사라고 합니다. 세례성사 때의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막연한 결심을 넘어서는 보다 구체적인 직무를 부여받는 성사입니다.
어른이 되면 직장을 어떤 것을 얻을 것인지, 결혼을 누구와 할 것인지, 어디에서 살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견진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사만 받았다고 해서 다 어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히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태초부터 예언된 직무를 하나하나 수행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다 하나에서 열까지 오래전부터 계획된 삶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 요셉의 아들이어야 했고, 예루살렘에서 나야 했으며, 나자렛에서 살아야 했고,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으며,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죽어야 했고, 당신을 배반할 사람과 함께 다녀야 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야 하는 등의 모든 내용이 이미 구약에 다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알아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시며 당신의 길이 너무 힘듦을 표현하기는 했어도 결국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오늘 그 부분 중의 하나를 또 하신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도 구체적으로 정해 놓으셨을까요? 물론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아버지께서 정해놓은 길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이 다른 길로 가고 있을 것입니다. 길이 정해져 있지만 가고 안 가고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네비게이션이 어떤 길을 가리키고 있지만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운전자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왜 우리의 길을 정해놓으셨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를 최대한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차를 끌고 처음으로 부산을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외할머니 댁에 갔던 것인데 용호동에 집이 있습니다. 기차만 타고 다니다가 처음으로 차를 몰고 가니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마을과 집을 알고 있으니 잘 찾아가리라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시내에서 헤매고 난 뒤에 부산 길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택시 운전사에게 부탁하여 앞장서라고 하고 저는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하마터면 놓칠 뻔 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목적지까지 가는 최단거리의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완전한 행복입니다. 가나안 땅이고 에덴동산이고 하느님나라이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길을 지나야합니다. 만약 우리 능력으로 가려고 한다면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혼자 노력하다보면 지은 죄를 또 짓게 되고 노력을 하지만 발전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차에 네비게이션을 장착하면 그 길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만약 다른 길로 들어가면 거기에서부터 다시 목적지까지의 길을 잡아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최단거리로 완전함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언가 계속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사십 일간 단식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당신의 소명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밤과 새벽에, 특히 새벽에 하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사도들을 뽑을 때는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항상 기도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럭저럭 살다가 천국가면 되는 거지 뭐, 굳이 그렇게 고생하며 살 필요 있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 간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나비가 다 번데기에서 나온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닌 것처럼 천국에서 작은 애벌레들은 파리 같은 작은 나비로, 큰 애벌레들은 큰 나비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 세상에서 자신을 완성하고 나비가 되어 연옥의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축구나 야구경기를 할 때 어떤 때 금메달을 따면 군에 가지 않은 선수들이 군 복무를 면제받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뛰지만 사실 벤치에 앉아서 한 번도 그라운드에 올라오지 못하고 단순히 팀의 우승으로 그런 특례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특례를 받아서 기쁘기야 하겠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당당하게 받는 것과 남들 노력으로 벤치만 지키다 받는 것과 그 기쁨과 성취감의 차이는 큽니다. 사람들이 '넌 한 게 뭐가 있냐?' 라고 물을 수 있고 자신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옥 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영원히 하느님나라에 있는 것도 편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공로를 쌓아서 조금이나마 당당하게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행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그러나 더불어 구체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동지침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도 어떤 것 하나도 구체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영광은 그 소명을 하나하나 수행하였을 때 온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물인 성령님을 잘 간직하는 방법은 그 분의 뜻을 잘 따르는 일입니다. 그 분을 따르지 않으면 성령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값을 치러야합니다. 바로 성령님의 열매인 행복을 잃는 것입니다.
견진성사는 영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로 그만큼 능력도 늘어나지만 책임도 커집니다. 그러나 누가 책임이 커져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까? 책임이 늘어나도 결혼을 하는 이유는 그 책임보다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견진을 받으면 그만큼 책임도 많아지지만 그 작은 멍에보다도 항상 행복이 더 큰 법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대로 성령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요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요구하는 일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순간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 하다보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