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희가 듣는 가운데... [허윤석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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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순정 | 작성일2010-01-24 | 조회수40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0년 1월 24일 강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찬미예수님.
오늘 특별히 총 원장 수녀님 영명 축일을 축하하면서, 이 미사를 통해서 총 원장수녀님께서 수도회와 우리 한국교회 복음화를 위해서 영육간에, 또 주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잠시 오늘 저와 함께 복음을 묵상해봅시다.
오늘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회당에서 성령을 받으셔서 선포하시는 내용을 보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질문을 한번 해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말씀이 내가 선포하는 데서 이루어졌다”라고 얘기했다면, 더 자연스럽고 그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나……
왜냐하면 선포하신 그분의 권위와 실천력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오늘 이 성경말씀이 내가 말한 가까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포의 수여자인, 너무나 부족하고 미약하고 죄스러운 우리 가운데에서~ 우리가 들음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이 위험천만하지 않은가……
그것의 성패가 우리의 들음에 달려있다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어머나!! 어떻게 하는가…… 저분의 이 중요한 구원의 말씀이 우리의 들음에 있다……’
오늘 이 시간은.. 과연 듣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이 듣는다는 것을 한문으로 쓴다면, 들을 청(聽)자가 되겠죠. 오늘 제2독서와 복음에 들을 청(聽)자의 의미가 다 많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 들을 청(聽)자는 한문의 4가지 글자가 합쳐졌는데~ 귀 耳 임금 王 성장할 㥁
임금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오늘 복음 말씀처럼 듣는 가운데라서 귀耳자 바로 아래 작은 임금이 있습니다. 그 임금王자는 절대로 귀 耳자보다 크게 쓰지 않습니다. 한문에서나 행서를 쓸 때 청자는 임금 王자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임금 王자는 귀이자 아래 가운데 있죠…… 마치 귀가 임금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모님 모습 같아요……
들음이라는 성모님의 존재자체…… 성모영보, 성모잉태의 모습은 그분께서 주님의 말씀을 숙명으로 들음으로써 잉태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이룩해주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임금이 듣는 자들 위에 군림하거나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 내려오시는 겸손의 통치권자이심을 나타냅니다. 그 작은 마음은 당신의 사랑의 방식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육화의 신비, 겸손의 신비, 우리는 들을줄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모시는 하느님은 들음을 가치 있게 우선순위로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㥁 자..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그 성장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㥁 자에 보면, 열 十 사방 四 한 一 마음 心
하나의 마음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지도자만 갖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있는~ 열 곳에 있는~ 그 모든 이들이 하나되기 위한 것입니다.
제 2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도직과 소위 말하는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신자로서~ 제일 중요한 복음의 해 오늘이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들음을 통해서 영성체를 통해서 오시는 작은 나를 위해 쪼개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부족한 우리모두가 합심해서 하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제일 중요한 방법이 듣는 것이고, 오늘을 은혜의 해로 선포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정말 죄송스럽게도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협조자이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서 듣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들을 聽 자는 임금을 교육하는~ 임금의 스승에서 나온 글자라고 합니다. 작은 임금이 들음을 통하여 많은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대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 그러고.. 오른편에 열 十 자 모양은 임금의 왕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저는 사제이기 때문에 한문풀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悳 자 보면 열 十자, 십자가 十자의 사방 四 자가 있는데, 저는 그것을 바꿔서 열 十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사방 四자 네 개의 복음이 아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공로가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바로 오늘의 회당에 잇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복음의 힘은 하나의 마음을 갖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사제나 수도자들이 소임이나 일하는 것에 있어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성적인 상식적인 판단과 언행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작은 임금의 마음으로 하나의 마음으로 가기 위한 방법론이 낫지 않나…… 일심 그것이 성장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지체로서 보면, 열등하고 추하기까지 한 모습들이 예수님의 몸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수도 안에서 신자들의 삶 안에서도 우리의 부족한 부분은…… 오늘은 내가 누구를 감싸주고 누구를 위한 지체. 아름다운 지체여서… 늙고 병들고 죄짓는 상황에서는 옆에 있는 지체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 소임 안에서 잘잘못과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점점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아름다운 들을 聽을 한문……바라보면서 그런 모습으로 사셨던 예수님. 그의 어머니 그 말씀을 그 가운데에서 바로 우리 모든 이들을 위한 성장에 숙명 하신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기도하면서…..
오늘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무안한 책임감과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징표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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